<font color="darkblue">학생시절 분단문제에 눈뜬 뒤 평생 북한 법전을 연구한 북한법연구회 장명봉 교수…대북 사업자들의 관심 늘어나고 북한 법학자들과의 교류 가능성도 트여</font>
▣ 글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북한에도 법이 있나요?”
많은 이들이 장명봉(64) 국민대 법대 교수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는 기자를 만나기 바로 앞서 여의도에서 만난 다른 이한테서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북한 법을 연구할 만한 게 있나요? 교시나 명령으로 통치되는 나라 아닙니까?” 일반인들의 무지만도 아니다. 대학 교수들한테도 간혹 받는 질문이다. 사람들의 물음표는 다소 생소한 북한 법 연구 교수에게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는 우리 사회의 북한에 대한 선입관이나 편견이 그만큼 지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편이라고 말한다. 지난 12월27일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있은 인터뷰에서 그는 “북한에도 당연히 법이 있죠. 북한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고 알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고 했다.
최대 난관은 자료 수집
장 교수를 주목하게 된 것은 북한법연구회가 12월30일 제100회 월례발표회를 갖기 때문이다. 1993년 첫 모임을 가진 이래 13년 동안 계속돼온 것이다. 연구회의 성격은 “남북한의 통일 과업에 대비하고 법학과 법 실무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라고 밝힌 회칙에서 잘 드러난다. 연구회가 북한 법의 학문적 연구 토대를 닦았다는 것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2001년부터 북한법연구회의 회장을 맡아온 장 교수는 1999년까지 초대 회장을 맡은 최달곤 고대 법대 교수와 함께 북한 법 연구의 선구자 구실을 해왔다. 72년 그의 석사 논문은 ‘북한 사회주의 헌법상의 통치구조에 관한 연구’였다. 그리고 박사 논문은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을 중심으로 본 ‘공산권 헌법에 관한 연구’였다. 그는 ‘북한 헌법의 체계와 특색’ ‘우리 통일정책과 헌법 문제’ ‘남북경협 활성화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 모색’ ‘신의주 특별행정기구 기본법의 의미와 평가’ 등 북한 법과 관련해 숱한 논문과 공동연구를 내놨다. 언뜻 보면 북한 말씨를 쓰는 것 같아 주위에서 고향이 이북이 아니냐는 오해를 사는 그는 제주도 출신이다. 한평생 북한 헌법을 끼고 살아서인지, 북한 말투가 자연스럽게 입에 밴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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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처음 북한 법에 관심을 둔 것은 69년 군 제대 뒤 대학에 복학하면서다.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65년 서울대 법대 학생회장을 맡으면서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펼치다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정통성이 취약한 (박정희) 쿠데타 군사정권이 기반을 구축하려 한-일 관계 정상화를 굴욕적으로 졸속 처리했다. 당시 이런 모든 것들을 분단이란 모순된 현상이 빚어낸 것으로 인식했다”고 말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그는 ‘6·3동지회’ 부회장을 맡았다. 3년 동안 최전방의 철책에서 근무한 것도 민족이나 통일 문제를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게 했다. 법학도였던 그가 민족 문제를 학문적으로 접근하게 된 계기들이다.
북한 법 연구의 최대 난관은 자료 수집이었다. 북한을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법 연구자들을 괴롭혔다. “60년대나 70년대엔 연구하고 싶어도 자료가 없었다. 일본이나 제3국을 통해 헌법 자료 등을 수집해 연구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장 교수는 자료 수집이 어렵기 때문인지 기자들이 취재원을 공개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경로로 누구한테 자료를 수집하는지 전혀 털어놓지 않았다. 북한 법 연구자들한테는 일종의 ‘영업 비밀’의 영역이다.
대학원·학부 과정도 활성화
이제 옛날만큼 북한 법을 왜 연구하냐며 무용론으로 공격해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 남북 교류가 활성화된 상황에서 대북 사업자들이 ‘금강산관광지구법’ ‘개성공업지구법’ 등 북한의 현행 법을 이해하고 알아야 하는 것은 필수가 됐기 때문이다. 시장의 수요가 생긴 것이다. 북한 법 관련 세미나에 북으로 진출한 기업들의 대표들이 찾아와 자료를 구해가는 것은 흔한 일이 됐다. 법률적 분쟁에 대한 연구 의뢰도 간혹 들어온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연구의 저변도 넓어지고 있다. 북한법연구회가 20명도 안 되는 법률가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회원이 100여 명이나 된다. 2001년 한국법학교수회 안에 꾸려진 북한법연구특별위원회(위원장 장명봉)에도 이제 교수 15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교수뿐 아니라 변호사, 판사, 검사 등 직군도 다양하다. 장 교수는 같은 해 국민대에 북한법제연구센터를 세웠다. 국민대는 국내 대학 가운데 유일하게 대학원 과정에 북한 법 관련 과목을 그것도 20여 개나 개설했다. 이곳에서 배출된 석·박사 학위자도 10여 명이나 된다. 대학원생의 대부분이 변호사라는 점은 북한 법의 수요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 대학의 학부 과정에도 ‘북한 법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비롯해 ‘통일과 법’ ‘북한 통치 구조와 법’ 등 다양한 과목이 있다. 특히 그는 ‘사제동행’이란 과목을 통해 학기마다 번갈아가면서 통일법과 북한 법을 주제로 세미나를 한 뒤 제자들과 금강산에 가서 현장체험과 토론학습을 한다. 그는 “대학생들이 제출하는 보고서를 보면 왜 이런 교육이 필요한지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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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노력으로 북한 법학자들과 정례적인 교류 가능성도 트였다. 2005년 9월 중국 선양에서 열린 국제고려학회 학술회의에 한석봉 사회과학원 법률연구소장과 안천훈 박사 등이 참가했다. 그는 “북한 법학자들도 정치를 앞세울 것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그렇지 않았다”며 “법적인 기반 위에서 남북 관계가 지속적·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남북 법학자들이 뒷받침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고 말했다. 이들과의 교분을 바탕으로 2006년 3월 중국 런민대학에서 북한법연구회와 사회과학원 법률연구소, 런민대학 법학원이 공동으로 학술회의를 개최하기로 구두 합의를 마쳤다. 개성공단 등 남북 교류 협력사업을 위한 법적 문제점을 개선해나가는 것이 양쪽 법학자들의 시급한 과제라고 그는 말한다.
북한 사회를 바라보는 하나의 창
북한법연구회는 2004년 8월에 처음으로 발간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법전(대중용)을 맨 먼저 입수해 국내에 소개했다. 그 뒤 그는 6·15 5주년 행사차 평양을 방문했을 때 고려호텔 책방을 가장 먼저 찾았다. 그곳에서 법전이 미화 108달러에 시판되는 것을 보고, 법전 발간이 대외적 선전용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국내에선 북쪽과 계약을 맺은 법률출판사가 법전을 출판했다. 남북한 어디에서든 북한 법전을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북한 법 연구를 북한 사회의 모습과 변화를 바라보는 하나의 창으로 인식한다. “북한이 아직도 1당 지배체제, 수령 지배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명령이나 교시에 의한 통치에서 점차 법에 의한 통치로 변해가는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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