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지역사회 위한 요구안에도 고임금만 부각된 LG칼텍스정유 파업
중노위 직권중재에 위법 판결 내려졌으나 노조 간부들은 아직도 거리 헤매
▣ 양상우 기자/ 한겨레 사회부 ysw@hani.co.kr
지난 10월26일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끝난 뒤, 한 민주노동당 의원은 “민주노동당의 패배는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대기업 노조와 민주노총이 보여준 한계에 대한 사회적 실망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민주노총의 한 간부도 “대공장 노조들이 노동자 내부의 차별을 온존시키며, 노동계급의 해방을 입에 올리기는 힘들다”고 고개를 떨궜다. 사용자단체나 보수 언론들로부터 “사회적 약자들과 비정규직의 고통에서 눈을 돌린 채 ‘제 몫 지키기’에만 골몰한다”고 비판받아온, 이른바 ‘이기적인 대기업 귀족노조’는 이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된 셈이다.
동료들의 생활비 지원도 않는 새 집행부
‘짙은 안개’ 속에 갇힌 민주노총과 민주노조 운동의 활로를 열기 위한 노동운동가들의 고민이 깊어가는 가운데, 지난해 여름 LG칼텍스정유(현 GS칼텍스정유) 노조의 파업 투쟁을 곱씹는 노동계 인사들이 적지 않다.
지난해 7월, 국가 기간산업인 정유업체 노조가 벌인 투쟁은 파업 돌입 이전부터 사회적 관심과 긴장을 고조시켰다. 정유업체의 파업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고, 파업에 따른 경제·사회적 파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수 언론들은 LG칼텍스정유 노조원들의 평균 연봉이 6천만원을 넘는다는 것만으로 크게 ‘흥분’했다.
노조가 전면 파업에 돌입하자, 예상대로 “연봉 6천만원을 받는 노조원들의 반사회적 파업”이라는 보수 언론들의 ‘융단폭격’이 시작됐다. 물론 파업의 구체적 이유는 대부분 거두절미됐다. 정부는 불법 파업으로 단죄하고 나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파업 투쟁 중 노조가 벌인 회사 최고경영자에 대한 ‘참수(斬首) 퍼포먼스’는 그렇지 않아도 감당하기 힘들던 사회적 비난 여론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결국 지난해 8월9일 노조는 파업 19일 만에 ‘파업 철회, 현장 복귀’를 선언하며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이어 파업 중 회사 쪽으로부터 고소·고발된 129명의 조합원 가운데 김정곤 위원장 등 지도부 8명이 구속되고, 전체 조합원 1200여 명 가운데 647명이 징계를 받았다. 노조 지도부는 완전히 와해됐다. 조합원들은 불과 몇 주가 지나지 않아 파업을 이끈 지도부를 외면했다. 지도부 구속 뒤 들어선 새 집행부와 대의원들은 파업 투쟁 4개월 만인 12월 민주노총을 탈퇴했다. 그뿐이 아니다. 새 지도부는 파업을 이끌다 해고된 김정곤 위원장 등 동료들의 생활비 지원조차 하지 않을 만큼 냉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불과 수개월 전 정부와 사용자, 그리고 보수 언론들의 융단폭격 속에서도 1200명의 조합원 가운데 829명이 무려 16일 동안이나 파업 대오를 지켰다는 사실이 의아할 정도다.
도대체 LG칼텍스노조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하늘’과 ‘땅’이 뒤바뀐 듯한 상황이 벌어졌을까?
역설적이게도 지난해 파업 당시 보수 언론들의 사설은 그 발단을 잘 설명해준다.
공포 분위기에 노조원들 보수화
“LG칼텍스정유 노조 등은 이라크 파병 반대, 비정규직 차별대우 철폐, 완전한 주5일제 획득 등을 요구했다. 임금 문제는 아예 주요한 이슈로 내걸지도 않았다. 그만큼 사치스런 요구를 내걸었던 것이다.”(<조선일보> 2004년 8월8일)
“LG정유 노조는 임금 인상과 지역사회 발전기금 조성, 비정규직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기금 조성과 비정규직 문제는 노사 간 교섭대상이 아니다. 임금 인상도 불법 파업을 해야 할 만큼 절박하다고 보기 어렵다. LG정유는 노조 쪽 자료로도 10년 근속 노조원의 연봉이 6천만원에 이르는 대표적인 고(高)소득 직장이다.”(<동아일보> 2004년 7월20일)
실제 LG칼텍스 노조의 3대 핵심 요구는 △비정규직 동료 노동자들의 단계적 정규직화 △일자리 창출을 위한 완전한 주5일제 근무 △지역사회개발분담금 출연(매출액의 0.01%)이었다. 물론 임금 인상 요구도 있었지만, 상급단체인 민주노총이 제시한 임금 인상 가이드라인을 그대로 옮겨놓은 데 불과했다. 파업 투쟁 초기, 노조는 이마저도 철회했다. 즉, 자신들보다 약자인 비정규직과 실업자, 그리고 지역사회를 앞세운 투쟁을 펼친 것이다.
이에 대해 파업 투쟁 뒤 해고된 오승훈(41) 노조 부위원장은 “당시 임금 동결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던 파업 지도부에, 중앙노동위원회는 직권중재안을 통해 4.5% 임금 인상을 제시했다”며 “그러나 LG정유 노조가 꿈꾼 것은 비정규직 동료들과 지역주민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일터와 사회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패한 투쟁의 대가는 가혹했다. 무엇보다도 구속과 해고로 노조 조직력이 무너지면서, “회사가 조성한 공포 분위기에 노조원들의 의식이 급격히 보수화한” 것이다. 오 부위원장은 “회사 쪽의 강압적인 노조 탄압 속에 조합원들이 ‘안정적인 직장’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처우’와 ‘회사 쪽의 잔인한 응징’이 조직력의 급격한 와해로 이어진 셈이다.
대법원은 지난 5월, 지난해 LG칼텍스정유 노조의 파업을 불법으로 몰아간 중노위의 직권중재가 위법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이 판결로 LG칼텍스 노조가 짊어져야 했던 ‘불법 파업’의 억울한 ‘멍에’는 사라졌지만, 바뀌어진 현실은 아무것도 없다.
‘불법 파업’을 전제로 해고당한 노조 간부들은 여전히 거리를 헤매고 있고, 노조도 예전의 노조가 아니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1월17일 부당해고 구제신청에 대한 중노위의 심판을 앞두고, 현재 김 위원장 등 해고 노조원과 간부들은 번갈아가며 서울 마포구 공덕동 중노위 건물 앞에서 천막노숙 투쟁을 벌이고 있다.
파업 투쟁을 앞장서 이끌었던 김 위원장은 “억울한 옥살이” 탓에 건강도 잃었다. 829명의 파업 대오가 무너진 뒤, 해고된 16명이 감옥과 거리에서 복직 투쟁을 벌여왔지만, 그 가운데 2명은 생활고에 새 삶을 찾아 떠났다.
유영구 민주노총 화학섬유산업연맹 교육선전실장은 “중노위는 지난해 파업 직전 LG정유 노조의 ‘3대 요구안’에 대해 경영권의 문제라며 교섭대상이 아니라고 결정했었다”며 “보수 언론과 자본이 진실과 현실을 물구나무 세우는 바람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건강한 대기업 노조마저 무너져내리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러나 냉기 가득한 천막에서 새우잠을 자며 농성과 1인 시위를 이어가는 오 부위원장은 “지금 회사에 남아 있는 노조원들은 단지 구심점을 잃었을 뿐이라며 건강한 노동과 사회를 위한 LG칼텍스정유 노조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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