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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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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재일 코리안의 기막힌 소송

등록 2005-10-20 00:00 수정 2020-05-03 04:24

조선학교 이사장 지내다 총련에 파면된 뒤 일본 법원에 호소하려는 리강열씨
파친코로 돈 벌어 20년간 민족교육에 후원하다 ‘이적행위자’로 몰린 사연

▣ 오카야마= 신명직/ 구마모토가쿠엔 대학 조교수 mjshin59@hanmail.net

오카야마현에 있는 구라시키시로 떠나려는데, 뉴스에선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칠 거라는 예보를 내보내고 있었다. 신칸센을 타고 오카야마역까지 가서 지선으로 갈아탄 뒤, 구라시키역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가 갓 지날 무렵이었다. 역 앞의 간판들이 몰아치는 비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몇 차례나 공중제비를 해댔다. 먼저 ‘오카야마 조선초중급학교’를 둘러봤다. 작은 개천을 둘러싸고 형성된 조선인 마을 한가운데에 학교는 위치해 있었다. ‘우리 학교를 위하여 한마음’이라고 쓰인 학교 들머리 건너편으로 ‘미쓰비시 자동차’ 사택 팻말이 보였다.

구라시키와 식민지 조선의 인연

구라시키(倉敷)란 지명이 그렇듯이 그곳은 거대한 공장의 보급창고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지만, 옛날 창고를 개조해 만든 상가 주변에는 아직도 ‘방직공장’ 터가 남아 있었고, 그곳을 흐르는 작은 개천은 바다로 물건을 실어나르는 운하 구실을 해온 것 같았다. 나를 안내해주는 이는 그곳 방직공장에서 많은 조선의 처녀들이 힘들게 일해왔다고 일러주었다.

하지만 구라시키와 식민지 조선의 인연은 ‘미쓰비시 중공업’과 더 끈끈하게 맺어져 있는 것 같았다. 당시 미쓰비시 중공업은 군수물자를 생산해내던 곳으로, 군용기, 군함, 전차 같은 것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일본 오사카 서부지역인 주고쿠와 시코쿠 사이의 바다 세토나이카이를 따라 초대형 중공업단지를 만든 일본은 그 일부를 매립해 도시를 만들었고, 그곳에 대형 군수공장의 하청공장과 사택들을 지었는데,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은 먹고살 일자리를 찾아 혹은 강제징용으로 이곳에 모여들게 되었고, 구라시키 곳곳엔 자연스레 ‘조선인 부락’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구라시키의 ‘오카야마 조선학원’ 이사장인 리강열(58)씨 역시 ‘조선인 부락’ 출신이다. 일본에서 ‘부락’은 일종의 차별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거기에 ‘조선인’이란 단어까지 붙으면 그 의미는 배가된다. 아무튼 지금은 그가 구라시키시 전체에서 6번째 고액 소득자에다 소득세만도 3600만엔이나 내고 있지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그는 낮엔 ‘조은신용조합’에 다니고 밤엔 조선인 부락에서 어머니와 함께 돼지를 키웠다. 밤낮 없이 짬밥(잔반)을 걷어다 돼지 키우는 일이 하도 지겨워 ‘파친코’ 업을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일본 서부 지역에서 큰 파친코 업자가 되었다며 그는 멋쩍게 웃었다.

리강열 이사장이 조선학교를 후원하기 시작한 이유는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아이들이 조선학교에 가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본인이 일본학교에 다니면서 이것저것 마음고생을 많이 한 터라 흔쾌히 승낙했는데, 조선학교 재정이 무척 어렵다는 말을 듣고는 앞뒤 가리지 않고 재정을 지원할 방도를 찾았다고 한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여러 선배들과 함께 ‘애교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1계좌에 2천엔씩 250계좌를 만들어, 한달에 50만엔씩을 보탰다. 거기에 자판기 운영 수익금 등 개인 돈까지 보태, 20여년 동안 그는 학교 재정을 거의 책임지다시피 했다. 한때 60~70명 하던 아이들은 150여명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구라시키 조선학교의 ‘애교회’ 이야기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에도 소개되어, 재일 사회의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올해 5월 오카야마 조선학원 이사장직에서 해임됐고, 지난 8월19일엔 이사직에서도 해임됐다. 조선학교를 위해 20여년간 정신적·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던 그를, 총련은 남쪽을 이롭게 했다며 ‘이적행위를 한 자’라는 죄목을 들씌워 내쫓은 것이다. “대체 ‘범민족 교육’을 하자는 사람을 내쫓는 경우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를 만나 처음 들은 단어는 ‘범민족 교육’ 혹은 ‘통일 교육’이었다. 언뜻 한국에서 험했던 시절, ‘범민족 교육’을 외치다 감옥에 갔던 어느 전교조 선생님의 이름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북과 남이 협력해서 ‘개성공단’을 만드는 시절 아닙니까? 언제까지 일본에 사는 아이들을 반쪽짜리 아이로 만들어야 하느냐”며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총련은 왜 그를 내쫓았나

무엇보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민족교육의 파탄이었다. 지난해 오카야마 조선학교 초급부 신입생 수는 남학생 1명에 여학생 5명을 합해 모두 6명에 지나지 않았다. 3년 전부터 입학생 수가 한 자릿수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오카야마현에 있는 민족학교는 학생 수가 가장 많던 1950년대엔 초급부 학생만 1500여명에 이르렀던 적도 있다. 물론 출산율 저하(소자화)로 매년 절대적 학생 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카야마현만 해도 5~19살의 한국 국적과 조선적 취학연령 아이들의 수는 현재 대략 1천여명. 조선학교가 없는 인근 돗토리, 시마네, 고치, 가가와현까지 통틀어 초급부 1학년 신입생 수가 6명뿐이라는 사실은 출산율 저하라는 핑계만으로 대충 얼버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조선학교 졸업생들만이라도 자신의 자녀를 조선학교에 입학시켰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며 “민단계, 뉴커머, 그리고 일본으로 귀화한 이들의 자녀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학교로 변화되지 않는 한 민족학교의 미래는 없다”고 했다. 남북을 아우르는 범민족 교육은 조선학교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방책인 셈이다.

위기감을 느낀 것은 리강열 이사장만이 아니다. 지난해 4월 입학식이 열린 직후, 인근 학부모들과 학교 관계자, 지역의 총련 활동가(일꾼)들은 조선학교 개혁에 관한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하지만 총련의 입장은 단호했다. 총련 중앙은 학교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라도 쫓아내겠다고 했다. 논의할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논의하려는 사람도 모두 쫓아내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총련 중앙 교육국에 몇 차례 대화를 요청했지만, “단 한번도 대화에 응하지 않았”으며 “총련은 현재 학교를 추스를 ‘비전’도 ‘힘’도 ‘마음’도 없는 상태”라고 리 이사장은 못박았다.

이른바 ‘학교 통폐합’을 모두 총련 ‘지부’에 떠넘긴 채 ‘중앙’은 학교가 무너질 날만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실제 학교는 1990년 152개교, 학생 수 2만1580명이던 것이 2003년엔 121개교에 1만2천명가량으로 줄어들었다. 지난해엔 야마구치 조선고급(고등)학교가 폐교됐고, 해마다 800~1천명 정도의 학생이 줄어들고 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아마도 2~3년 내로 조선학교에 대한 개혁 논의가 본격화될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사이에 조선학교가 살아남아줄 수 있느냐는 것”이라며, 문제의 핵심은 ‘개혁의 시간’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손 놓고 2~3년 기다릴 수도 있지만, 그때쯤이면 이미 학교는 사라지고 없을 거라며 안타까워했다.

총련 중앙이 리강열 이사장을 해임한 또 다른 이유에는 그가 ‘21세기 민족교육 네트워크’ 공동대표라는 점도 강하게 작용했다. 지난 2003년 4월에 총련 전임과 비전임을 포함해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 관계자 30여명이 민족교육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는 포럼을 개최했는데, 그때의 주최쪽 명칭이 바로 ‘21세기 민족교육 네트워크’였다. 물론 ‘21세기 민족교육 네트워크’가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7년 전부터 일본 각지에서 학교 운영을 책임지는 교육회 회장, 학교 관계 유지들이 오카야마 조선초중급학교의 교육회 경험을 배우려고 찾아온 것이 계기가 되어 이른바 ‘공부모임’이 꾸려지게 됐는데, 그 뒤 그들은 줄곧 위기에 처한 ‘민족교육’의 대안 찾기에 골몰해왔다고 한다.

북한 축구대표 리한재 선수의 아버지

하지만 총련은 이에 대해 ‘민족교육을 변질시키려는 행위’ 혹은 ‘한국 국가정보원과 연계해 민족교육을 팔아넘기려는 모의’라는 식의 사실무근인 악선전을 계속해왔다고 한다. “학교를 통폐합해서 그저 없앨 생각만 하는 총련을 보면 어떤 때는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면서 “부디 아이들을 최우선에 두고 생각하던 옛날의 초심으로 돌아가달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리강열 이사장은 월드컵 북한 대표팀 축구선수인 리한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오카야마 조선학교를 나온 리한재 선수는 현재 일본 축구 J리그 ‘산프레체 히로시마’ 프로팀에 소속돼 있으면서, 월드컵 예선전과 얼마 전에 있었던 동아시아컵 등에 북쪽 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한 바 있다. 리강열 이사장은 “또 하나의 꿈이 있다면 한재가 남북한 단일 축구대표팀에서 뛰는 것을 보는 거”라며, 그러기 위해서라도 조선학교를 남북을 아우를 수 있는 학교로 하루빨리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남북을 아우르는 21세기의 새로운 민족교육. 대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1945년 이후 남과 북의 역사를 모두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남과 북의 네이티브 스피커도 부르고,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수업을 하는 학교. 그래서 일본의 시골학교에 다니면서도 세계를 생각하고(글로벌), 지역을 고민할(로컬) 줄 아는 아이를 키워내는 것”이라고 그는 대답했다. 한국어와 일본어만 잘하는 ‘바이링궐’이 아니라 ‘멀티링궐’인 아이들, 재일 코리안이라는 특수한 조건을 긍정적으로 살려내 세계와 지역에 이바지할 수 있는 아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와 함께 ‘공부모임’을 해온 민족학교 관계자들의 꿈이라고 했다. 총련계만이 아닌 모든 코리안의 아이들, 그리고 다양한 언어와 국제적 감각을 배우고 싶어하는 일본인의 아이들까지 함께 담아낼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현재 리강열씨는 이사장직에서도 이사직에서도 파면된 채, 일본 사법부에 소송을 낼 준비를 하고 있다. 개성공단을 남북이 함께 만드는 시절에, 해외에서 남과 북을 아우르는 교육을 하겠다는 이유만으로, 수십년간 민족교육에 몸담았던 자가 파면되고, 그 판단을 남도 북도 아닌 일본 사법부에 물어야 하는 이 아이러니. 재일 코리안들이 ‘본국’이라고 떠받드는 남과 북의 교육당국은 이같은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남과 북에서 이루어질 미래의 통일교육을 위해, 남과 북의 교육단체는 이들의 몸부림을 향해, 함께 손을 맞잡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순 없을까. 폐교와 부활의 갈림길에, 지금 재일 코리안의 민족교육은 서 있다.



노래하는 메신저, '담포포' 가 간다

리강열씨 통일교육 견해 지지했다 연습실에서 쫓겨났지만 인기는 더 높아져



“한 그루 나무도 한 송이 꽃도/ 너희들 웃음꽃 보고 싶어서/ 학교를 사랑해 미래 키우는/ 보람찬 우리 생활 너희들에게.” 몇년 전 도쿄에서 열린 총련 주최 노래대회에서 시골 아줌마 6명이 함께 부른 창작곡 <너희들에게>의 1절 내용이다. 오카야마 조선학교 학부모들로 구성된 이들 구라시키 노래소조 ‘코스모스’는, 지난 10년간 노래를 불렀지만 이 노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노래에는 조선학교를 나와 자신의 아이들 역시 그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들의 절절한 조선학교 사랑이 노래 곳곳에 담겨 있었다. 노래소조의 일원인 황영미씨가 작사하고 조미순씨가 작곡했다.
노래의 마지막 소절은 이러하다. “북이나 남이나 이역 땅이나/ 그 어데 살아도 뿌리는 하나/ 아리랑 손잡고 함께 부르는/ 통일된 조국산천 너희들에게.” 이역 땅에서 남과 북의 하나된 교육을 이루어내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전달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들은 오카야마의 구라시키 총련지부 사무실에서 이 노래를 더는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재일 코리안에게 남과 북을 아우르는 통일교육을 해야 한다는 오카야마 조선초중급학교 리강열 이사장의 견해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총련지부가 취한 태도에 실망한 그들은 총련지부가 더 이상 동포를 위한 조직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이후 지부 사무실에서 노래 연습을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총련 지부 사무실을 나와 노래 연습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찾아나섰다. 그래서 아이들 공부방 겸 작은 공간으로 만든 것이 지금의 ‘탐포포’(민들레)다. 작고 누추한 다다미방이지만, 그곳에서 열리는 아이들 방과후 수업이나 ‘우리말 강좌’ ‘보자기 만들기 강좌’의 열기는 무척 뜨겁다. 학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 ‘수학’을 가르치고 있고, ‘우리말 강좌’와 ‘보자기 만들기 강좌’에는 인근 일본 사람들도 참여하고 있다. 학부모들과 노래소조 구성원들간의 친목도모를 넘어, 2세·3세와의 교류, 나아가 총련 이외의 코리안과 일본 사람들과의 교류를 ‘탐포포’ 구성원들은 꿈꾸고 있었다.


최근 들어 노래소조 코스모스의 활동이 부쩍 늘어났다. 동포와 지역 사회의 요청이 쇄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불러온 동포 결혼식 축가는 물론, 최근에는 일본의 전통적 여름축제인 ‘봉오도리’에도 참가해 일본과 재일 코리안 사회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최소한 1~2주일에 한번 이상은 각종 행사에 초대될 정도로 코스모스의 인기는 높다. 그 비결은 초대된 행사에 맞춰 가사를 사전에 전부 새롭게 가다듬기 때문이란다.
얼마 전엔 소록도에서 온 한센병(나병) 환자들을 위한 집회에 초청되어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를 새로 가다듬는 과정에서, “그동안 재일 코리안들은 ‘피해자’라는 측면만 생각해온 것 같았어요. 한센병 환자와 같은 이들에겐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아이들이 자기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함께 보듬어 안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노래하는 메신저’라는 닉네임도 그런 과정에서 얻어진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총련 지부에서 나온 뒤 오히려 일이 더 늘어난 것 같다며 씁쓸해하기도 했다.
다시 이야기는 ‘조선학교’로 돌아왔다. “정말 1세들이 어떻게 지켜온 조선학교인지 아세요?” 아이들이 줄어드는 걸 볼 때마다 “아, 이젠 이 학교가 없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세대는 변하고 있어요. 정말로 고민하면서 뭔가 새롭게 바꿔가야만 한다”며 조선학교가 처한 절박한 위기를 노래로, 온몸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한국에 <아침이슬>이라는 노래가 있지요?” 조선학교를 생각할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파 종종 함께 <아침이슬>을 부른다는 조선학교 어머니들. 그들의 눈에 맺힌 작은 이슬방울이 유독 빛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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