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에 쓰러지는 ‘도복피해’ 방지약제 개발한 만경벌 농사꾼 정만덕씨
논밭을 거대한 실험실로 활용하며 탄저병·백엽고병 퇴치에도 도전할 예정
▣ 김제= 글·사진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태풍 나비로 인해 시름에 잠긴 농민들이 수두룩하다. 수확기를 맞은 벼가 ‘도복’(倒伏·생육 중인 작물이 비바람으로 쓰러지는 일)으로 피해를 입은 까닭이다. 태풍 피해를 입은 주택이나 각종 공공시설, 농산물에 대해서는 나름의 보상지원이 이뤄지는 데 견줘, 도복 피해를 당한 농민들은 하소연할 데가 어디에도 없다. 벼가 쓰러지면 인력을 동원해 벼를 일으켜세우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도복의 후유증이다. 한번 쓰러진 벼에서 싹이 트기 일쑤고 절미로 인해 상품가치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당연히 농부들은 어떻게든 도복을 막으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고품질·고기능 쌀을 생산해도 허사더라
한반도의 거대한 식량창고 구실을 하는 만경벌에 속한 김제시 주산면에서 농사를 짓는 정원덕(52)씨도 도복 피해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전국에 수해가 나도 만경벌만은 비켜간다고 할 정도로 안전하고 비옥한 천혜의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자부심도 쓰러진 벼 앞에서 참담하게 무너져내렸다. 도복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너무나 많았다. “벼가 쓰러지는 데는 태풍이나 강우 등 기상환경뿐만 아니라 재배기술, 품종 등까지 크고 작은 문제들이 개입한다. 대체로 키가 크고 줄기가 가늘거나 아랫마디가 웃자라면 도복에 쉽게 노출된다. 벼의 키를 조절하면서 지지력을 강화하는 게 관건이다.”
사실 정씨는 농사를 업으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농사일 언저리에도 가지 않으려 했다. 40대 초반까지만 해도 도회지에서 지내면서 명절이 아니라면 만경벌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여파로 사업이 흔들리고 농토를 지키던 부친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으면서 ‘울며 겨자 먹기’ 심정으로 드넓은 지평선이 펼쳐진 만경벌 깊숙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초보 농사꾼에게 농토는 만만한 일터가 아니었다. 때마침 오랫동안 누적된 농업의 구조적 문제가 불거져나오면서 농사에만 매달릴 수도 없었다.
“농민이 논만 지키고 있으면 살아갈 방도가 없다. 토양과 병충해 관리 등은 기본으로 하면서 쌀의 품질을 높여 경쟁력을 갖춰야 했다. 질 좋은 벼 품종을 선택해서 다양한 재배 기술을 동원하고 유통단계를 줄여 판로를 개척하려면 마케팅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다행히 품종 선택의 고민은 덜 수 있었다. 일찍이 부친께서 흑미(검은쌀)를 재배해 품질을 인정받은 때문이었다. 검은색을 돌게 하는 수용성 색소인 ‘안토시아닌’이 질병과 노화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활성산소를 효과적으로 중화시키고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흑미가 고품질 쌀로 대접받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흑미가 고품질 고기능성을 보장하더라도 비바람에 맥을 못 추면 허사였다. 뿌리를 튼튼히 만들어 도복을 예방하는 친환경 비료(미량요소 비료)를 사용하고 도복경감제로 출시된 약제를 사용해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이들은 도복을 완벽하게 방지하지 못하고 도복을 부분적으로 줄이는 효과가 있었을 뿐이다. 약제에 따라 처리 적기를 찾고 처리량을 맞추느라 안간힘을 써도 약제 비용을 뽑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농약업체를 수소문 해도 도복방지제로 나온 제품은 찾을 수 없었다. 몇종의 도복경감제가 있었지만 일부 품종에서만 효력을 나타냈다. 어떤 품종이든 효력을 보이는 도복방지제가 절실했다.”
살포 잘못해 다른 농가에 피해보상도
누구도 도복에 대한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은 상황에서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일부 연구자들이 육종을 통해 도복에 강한 종자를 만들어도 ‘품종’으로 거듭나지는 못했다. 설령 새로운 품종이 나와도 효능은 4~5년을 넘지 못했다. 그가 벼농사에 온전히 시간을 투자하는 기간은 해마다 2달가량이면 충분했다. 그는 나머지 기간을 활용해 육종 실험을 하고 농약 개발자로 나섰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러나 그게 쉽게 이뤄질 리 만무했다. 늦깎이 농부로서 내로라하는 농약업체도 손을 쓰지 못하는 도복방지제를 개발한다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렸다. 농약 개발에 관한 기초적인 공부를 위해 전북권에 있는 농과대학의 교수를 수시로 만났다. 그들에게 원하는 정보를 얻고 전문서적도 소개받아 밤에는 공부하고 낮에는 실험을 했다. 뜻밖의 원군을 만나 도복방지제 개발에 탄력이 붙기도 했다. 초보 농사꾼 시절 토양 샘플 실험을 의뢰하면서 인연을 맺은 농업 전문가였다. 그는 약물 연구 ‘노하우’를 오롯이 전수하며 기꺼이 실험에 참여했다. 초기에 아이디어 수준이었던 약물 모델이 약품 합성과 실험을 거치면서 어엿한 약제로 거듭났다. 무모한 도전이 차츰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도복방지제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정씨는 자신의 논 한켠에 약제를 살포하는 식으로 실험을 했다. 여기에서 일정한 성과를 보이면 실험 면적을 넓혔다. 이들이 개발하는 도복방지제는 뿌리로 들어가는 기존의 입제 도복경감제와 달리 비료살포기로 공중에서 뿌려주면 그만이었다. 그만큼 간편하게 살포하기에 실험지를 확보하기 쉬웠다. 그로 인해 정씨가 대물림 농지를 처분해야 하는 사태가 생기기도 했다. “도복을 방지하는 데는 유용한 양을 적절한 시기에 뿌리는 게 중요하다. 도복방지제 개발 초기에 살포 시기를 잘못 선택해 벼의 목이 작아지는 바람에 다른 농가에 피해 보상을 해줘야 했다.”
이제 정씨는 피해보상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4년여의 실험을 통해 자신이 개발한 도복방지제의 용량·용법을 검증했기 때문이다. 시제품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도복방지제의 효과는 손쉽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도복방지제를 뿌린 논과 그렇지 않은 논의 벼 쓰러짐 정도가 확연히 드러난다. 시쳇말로 발로 차도 끄떡없는 도복방지제 살포 농지의 벼는 태풍 나비도 가볍게 견뎌냈다. 이는 도복방지제가 벼의 키를 품종에 맞도록 자유롭게 조절하면서 뿌리를 튼실하게 한 까닭이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 창의력에 바탕한 벤처형 농업이 무르익고 있는 셈이다.
견학하려는 농민들의 발길 끊이지 않아
그의 농지에는 외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수확기를 앞두고 도복방지제의 효과를 살피려는 사람들이다. 겨우 시제품이 나온 상태라 상품화까지는 적지 않은 여정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효능을 지속적으로 발휘하는지를 파악하고 안전성을 검증받는 게 급선무다. 일단 효능만큼은 전문가들도 인정하는 분위기다. 경기도 농업기술원 작물기술과 최은수 농촌지도사는 “기존의 도복경감제보다 도복 방지 효과가 뛰어난 게 사실”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찰벼 계통의 키가 큰 품종에서는 도복을 막아낼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품종에서 효능을 발휘하도록 해야만 상품성을 인정받을 것이다.”
요즘 정씨는 만경벌에서 ‘정 박사’로 통한다. 이제 초보 딱지를 겨우 뗀 농사꾼이면서도 농업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에겐 논밭이 대학 연구실보다 활용도가 높은 실험실이다. 이미 도복방지제를 잇는 새로운 약제도 개발 목록에 올렸다. 박테리아로 인해 벼 잎이 하얗게 마르는 백엽고병(白葉枯病)과 고추가 검게 썩는 탄저병 등을 막을 방도를 찾아낸 것이다. 이들을 약제로 만들려면 적지 않은 개발비가 필요하다. 그가 자신을 브랜드로 삼은 보리와 흑미를 팔아서 개발비를 충당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지금으로선 도복방지제가 상품화에 성공해야만 ‘농민 연구자’의 후속작을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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