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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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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는 왜 싸우는가

등록 2005-09-01 00:00 수정 2020-05-03 04:24

성균관대 본고사 잘못된 문제 지적하고 1997년 재임용 탈락했던 김명호씨
미국 선진응용수학 익혀온 세월 뒤로 한 채 먹통 재단 상대로 소송 준비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대학에 복귀하면 이공계에 대한 폭넓은 안목을 살려서 선진 학문을 가르칠 텐데….” 이제는 강단의 기억이 가물가물한 김명호(49·전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씨가 배낭을 짊어지면서 푸념처럼 내뱉었다. 만일 10여년 전 ‘정직한 고발’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중견 교수로 대학 강단에서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교수 재임용제’라는 피도 눈물도 없는 ‘기게스의 반지’에 농락당하면서 형극의 나날을 보냈다( 1997년 10월9일치 ‘학문을 위한 양심의 수난’ 참조). 불의의 반지가 지닌 신통력은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까지 위력을 발휘했다. 그에게 교수 재임용 탈락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는 상황에서 학문적 야심도 꺾일 수밖에 없었다.

국내외에서 거들었지만 결국 이민대열로

문제의 발단은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성균관대 대입 본고사를 채점하던 그는 100점 만점 가운데 15점 배점인 수학Ⅱ 7번 ‘공간 벡터에 대한 증명’ 문항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영벡터가 아닌… a, b, c가 서로 수직임을 증명하라’는 문제가 수학적으로 가정에 오류가 있다며 수험생 전체에 모두 영점이나 만점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제를 출제한 교수진과 학교 당국은 “오류 여부 논쟁으로 채점을 무작정 미룰 수는 없다”며 ‘모범답안’을 일부 수정해 부분점수를 주는 식으로 수학 문제의 진실을 덮어버렸다. 그 뒤 그는 부교수 승진에서 밀려나고 재임용에서도 탈락했다.

“당시 학교 당국은 문제의 오류를 밝히기보다는 진실을 감추는 데 급급했다. 수험생의 문제 제기가 없었다는 등의 이유를 내세워 학내 문제를 외부에 유포해 학교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해교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대학에는 ‘눈엣가시’인 교수를 학교 밖으로 손쉽게 내몰 수 있는 기게스의 반지가 있었다. 전국 44개대 189명의 수학교수들이 ‘문항의 수학적인 오류’를 지적하고 재임용 탈락을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세계적인 수학자들도 그에 대한 학문적 사망선고의 부당성을 밝혔다. 하지만 대학 당국은 쓴소리에 귀를 닫았고 사법부는 “재임용 거부는 학교의 자유 재량”이라며 학교쪽의 손을 들어줬다.

국내에서 정직의 대가를 감당할 수 없던 그는 1996년 말 이민자의 대열에 합류해 뉴질랜드로 향했다. 학문적 양심을 내걸고 오류를 지적한 게 빌미가 되어 승진에서 밀려나고 재임용에서 탈락한 뒤 한국 사회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그러나 특별한 준비 없이 떠난 이민자가 할 만한 일은 없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수학을 가르치는 재주뿐이었다. 요행수를 기대하며 대학 강단을 기웃댔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나마 오클랜드대학 수학과에서 무보수 연구교수직을 제안한 것을 ‘뜻밖의 행운’으로 여겨야 했다.

아무리 가르치는 게 좋아도 무보수를 언제까지 감내할 수는 없었다. 명예퇴직으로 ‘뭉칫돈’을 챙긴 것도 아니라서 생계 부담을 털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에서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힘들었다. 나름대로 가르치면서 가족을 부양하려면 미국으로 가는 게 나아 보였다. 다행히 수학 문제 오류 지적과 관련해 도움을 준 학자들의 도움으로 뉴질랜드 정착 1년을 넘기지 않고 미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새로운 학문적 출발을 하고 싶었다. 일반 수학에 관한 연구로는 자리를 잡는 게 쉽지 않았다.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려고 했다. 무엇보다 배움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 대학에서도 쫓겨나다

처음엔 산타클로즈 캘리포니아주립대학의 연구교수직을 맡았다. 역시 무보수직이었지만 응용수학의 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정보공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세례를 받는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1999년 1월에 럿거스대학 폴 칸토 교수가 그를 부른 것이다. 입자물리학자에서 정보공학자로 변신에 성공한 폴 칸토 교수는 미 국방부 산하의 군사기술 연구·개발 기구인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지원을 받아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포스트닥’으로 정보처리에 관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여기에서 그는 6개월 만에 전혀 새로운 방법론에 근거한 ‘정보수집에 관한 기하학적 모델’이라는 논문을 완성했다. 다양한 정보 속에서 알곡을 가려내는 데 통계학의 ‘중심극한 정리’(Central Limit Theorem)에 따라 정규분포를 설정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선형대수학의 방법론에 따라 ‘선형독립’이라는 원리를 적용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개별 정보의 유사도를 파악해 핵심 정보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그에겐 수학의 원리가 첨단 학문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확인한 쾌거였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럿거스대학을 떠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포스트닥 신분이다 보니 연구 책임교수의 영향력이 컸다. 논문을 발표하려는데 연구 책임교수가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겠다는 것이었다. 공동 저자가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있었지만 내 이름을 넣지 않겠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항의를 했더니 연구실에서 나가라고 했다.” 한국에서 재임용에 탈락한 수학자라는 ‘꼬리표’가 어디에서건 씻을 수 없는 멍에로 작용했던 셈이다. 만일 그가 연구 책임교수의 요구에 고분고분 따랐다면 ‘교수 추천서’를 받아 다른 자리를 얻는 데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문적 양심을 지키려고 고난의 길에 들어선 그는 ‘권위의 노예’가 될 수는 없었다.

미국 대학에서까지 통하는 기게스의 반지를 확인한 뒤 대학 강단은 멀어져갔다. 응용수학자로서 데이터 분석 방법론을 터득한 그에겐 전혀 새로운 기회가 다가왔다. 놀랍게도 미국의 생명공학 기업들이 공동 연구를 제안한 것이다. 처음엔 세포핵 속의 염기서열에서 개인의 편차를 나타내는 SNP(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를 통해 질병 치료 모델을 개발하는 ‘DNAprint’라는 바이오벤처에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그 뒤로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게놈의 기능에 관련된 데이터를 분석하는 기업 등지에서 일했다. 어디에서건 수학의 범위를 확장하는 즐거움에 빠졌지만 대학이나 기업의 ‘소모품’일 뿐이라는 자괴감을 씻어내지는 못했다.

대법원 청사 앞에서 1인시위

그렇게 그는 수학자로서 연구 성과를 내더라도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다시금 수학 문제 오류 지적으로 인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헛일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비자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이국 땅에서 모든 것을 감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국내에 들어오기로 마음먹고, 친구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교육부 소청심사위원회에 재임용 거부 처분 취소를 청구하고 서울 중앙지방법원에 교수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3월31일 귀국한 뒤에는 ‘공정한 재판을 촉구하는 부당 재임용 탈락 교수협의회’ 회원들과 함께 20여년 동안 양심적인 교수들을 대학에서 추출한 대법원의 재임용법 해석의 문제점을 샅샅이 분석해 소책자를 펴내기도 했다.

“교수의 연구실적을 도외시한 채 학교 재단에 전권을 보장하는 대법원 판례는 바뀌어야 한다. 더구나 재임용 관련 사립학교법의 해석이 바뀌는 과정에서 법원조직법에 따라 ‘합의체 절차’를 밟지도 않은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이것을 바로잡아야만 희생양이 나오지 않는다.” 그는 지난 7월18일부터 대법원 청사 앞에서 6인의 재임용 탈락 교수와 함께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나홀로 소송을 진행하며 ‘법 앞에 만인이 불평등’한 현실을 수없이 목격하기도 했다. 10여년을 거친 들판에서 지내며 치열함을 버티는 방법도 터득했다. 어쩌면 오는 9월7일로 예정된 1심 판결은 시작일 뿐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에게 씌워진 불의의 올가미를 ‘사법부’가 벗겨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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