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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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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빵공장이 빵빵해지기를!

등록 2005-06-15 00:00 수정 2020-05-02 04:24

북녘 아이들을 위한 빵공장 사업 홍보대사 오지혜의 평양 방문기
“죽자 살자 해도 먹자가 최고”란 말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웃다

▣ 평양=오지혜/ 영화배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배우 권해효형과 함께 남쪽의 우리겨레하나되기 운동본부와 북쪽의 민족화해협의회에서 공동으로 하는 사업인 북녘 아이들을 위한 빵공장(정식명: 대동강어린이빵공장) 사업의 홍보대사다. 실무진들은 그동안 여러 차례 북쪽 실무진들과 만나왔드랬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각 지역 대표들과 홍보대사 둘을 합쳐 열다섯명이라는 대규모(?)의 시찰단이 빵공장 견학과 실무회의를 위해 평양을 다녀왔다. 배를 타고 중국을 거쳐가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이번에 운 좋게도 비행기를 타고 갔다오는 행운을 누렸다. 인천시에서 대규모 북쪽 지원사업을 한다 해서 북쪽에서 전세 비행기를 내줬고 열다섯 자리가 남아서 우리 팀이 ‘꼽사리’를 끼게 된 거다. 덕분에 비정부기구(NGO)와 정부기구(GO)들의 어색한 동행이 됐으나 너그럽게도 인천시쪽에서 비행기삯을 받지 않아서 그 예산은 변변한 기업 스폰서 하나 없이 개미회원의 회비로 운영되는 빵 사업에 의미 깊게 쓰였다. 이 자릴 빌려 빵공장을 대표해 인천시 관계자분들께 감사 말씀 드리는 바이다. 빵공장 시찰이 주목적이라고는 해도 내가 갔던 곳이 도쿄도 아니고 뉴욕도 아닌 ‘평양’이었기에 이번 여행은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 됐다. 그 감동과 가슴 쓰림을 독자들에게 짧게나마 소개한다.

퍼주기? 간에 기별도 안 갈 듯

짙은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예쁘장한 고려항공 승무원은 나를 보고 상냥하게 웃으며 방송으로만 듣던 바로 그 억양으로 “안녕하십니까?” 하며 인사를 건넸다. 내 인생 처음으로 구경(?)하는 북녘 동포였다. 곧이어 여느 비행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녀들이 나눠주는 신문을 받아들었는데 허걱! 말로만 듣던 <노동신문>이었고 거기엔 손바닥만 한 글씨로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자’라고 쓰여 있었다. 그제야 내가 진짜로 북엘 가는구나 하고 실감했다. 비판 일색이던 신문에 익숙해 있다가 ‘찬양’ 일색인 신문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좀 하려고 했는데 세상에! 벌써 다 왔단다. 엥? 이럴 수가? 그 비행기는 영공을 피해 빙 둘러 갔는데도 불과 한 시간 만에 우리 일행을 북한, 아니 북조선 땅에 사뿐히 내려놓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가까운 것을. 당황스럽기도 하고 신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열받기도 하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고 이 혼란한 감정은 3박4일의 여정 내내 나를 괴롭힌다.

민족화합협의회와 조선민주여성동맹에서 나온 여성 세분과 남성 한분이 우리 일행을 살갑게 맞았다. 순안 비행장에서 평양 시내까지 가는 길은 낮은 산을 개간한 밭과 그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논으로 이어져 있었고 식목일날 나무 심으러 나온 사람들처럼 모두들 농기계를 하나씩 들고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내 옆에 앉았던 민화협의 서옥선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식량 사정이 여전히 좋지 못해서 인민 모두가 농사일을 거두는 것을 ‘당’이 명했다는 거다. ‘당’이 하란다고 정말로 할아버지서부터 손자까지 농사일을 도우러 나온 그 일사불란함이 신기하기만 했다. 벅찬 가슴으로 동포의 일상을 훔쳐보고 있는 내게 그녀는 “우리가 어려울 때 남쪽분들이 성의를 표해줘서 고맙게 생각합네다”라고 말했다. 자존심 세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무원에게서 ‘고맙다’라는 말을 듣는 건 가슴 시린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절대적으로 도와줘서’가 아닌 ‘성의를 표해줘서’라는 그녀의 표현이 혹자는 ‘퍼주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겠지만 실제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상황임을 확인한 거 같아 더욱 마음이 아팠다.

평양 시내. 영화로 본 동유럽의 공산국가와 느낌이 조금 비슷했다. 건물 수와 크기에 비해 인구가 턱없이 적은데다 광고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마치 거대한 영화 세트장 안으로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페인트칠이 안 된 회색 건물들마다 붉은색 글씨로 쓰인 무서운(?) 구호들이 보였다. 끼니를 놓치는 아이들을 위해 일하러 간다는 방북 목적이 민망할 정도로 호화로운 식사를 대접받으면서 입맛에 딱 맞는 음식들에 반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대접 받으려고 간 게 아닌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고사리 나물과 도라지 나물 무침은 환상적이었다.

자존심은 모른 척하고 지켜주자

첫날은 만경대 김일성 생가를 둘러보고 소년궁전에서 아이들의 과외(?)활동을 지켜본 뒤 TV에서만 보던 엄청난 규모의 공연도 봤다. 무대에 오른 아이들만 100명이 족히 넘을 듯했고 객석엔 인천시 직원들과 우리 빵 사업 팀들을 1천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학생들과 교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한 시간가량 계속되는 그들의 천재적인(?) 교예 솜씨는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로 숙련되어 있었다. 인천시장의 정치적 무게 때문에 이뤄진 공연에 우리가 덤으로 관람한 것이긴 하지만 모든 환대가 너무 황송할 따름이었다. 어른보다 더 어른 같은 아이들의 춤과 노래 실력이 조금 징그러울 정도였고 시종일관 빠른 템포로 마치 전쟁을 치르듯 하는 공연 진행이 거슬리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걸 다시 명심한다.

오후엔 여맹 위원회를 방문했다. 남쪽에서 태어났어도 한가락 했을 것 같은 인상의 여맹 부위원장은 남과 북의 여성들이 연대해 힘을 합치면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고 했고, 빵 사업이 애국애족의 길로 발전하길 바란다고 했다. 우리들은 공동사업이라고는 하지만 도움을 주는 입장인데도 죄지은 사람들처럼 굽실하고 도움 받는 쪽에선 연방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체제에 대한 강력한 확신 때문이리라. 그녀의 그런 자세는 먹고살려고 미제에 가랑일 벌린 남쪽 동포들을 한심해하는 듯해 보이기까지 했다. 뜨끔했다. 숙소로 돌아와 24층 방에서 내려다본 대동강은 우리들의 착잡한 심정도 모르는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고, 일행들은 빡빡한 일정이 끝났어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애꿎은 들쭉술과 대동강 맥주만 축을 내고 있었다.

둘째 날은 묘향산을 찾았다. 하루 코스라 등산까진 못했지만 북에서 묘향산을 간다는 것은 곧 김일성 주석이 평생 동안 전세계 국가 원수들과 유명인들에게 받은 선물들을 전시해놓았다는 국제친선교류박물관이란 곳을 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하기에 우리도 그곳에 갔다. 아니, 안내받았다. 선물 하나 보는 데 일분씩만 잡아도 다 돌아보려면 2년이 걸린다는 설명이다. 김일성이라는 사람은 우리나라와 미국에게만 죽일 놈일 뿐 세계적으로는 체 게바라가 울고 갈 정도로 존경받는 독립투사이자 지도자였다는 사실 혹은 진실을 반나절 동안을 걸으면서 확인해야 했다. 김일성관, 김정일관 두 관으로 되어 있는 그곳의 규모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의 오십배를 곱해야 할 것이다. 기죽이기로 작정한 사람들처럼 우릴 데리고 다니는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생각해봤다. 하나 나의 그런 ‘저울질’은 이내 평정을 되찾는다. 현실은 어차피 서로 인정했으니 하늘을 찌를 듯한 그들의 자존심을 모른 척하고 지켜주는 것만이 동포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점심상 정성에 까무라칠 정도로 감동

우리 일행은 묘향산 작은 계곡 사이에 접대원 동무들이 차려놓은 점심상을 보고 그 정성에 까무러칠 정도로 감동을 해버렸다. 양념고기를 숯불에 굽고 개울에서 직접 잡은 칠색 송어회에 즉석 지리국을 끓여주더니 마지막으로는 그 먼 데까지 녹지 않게 포장해서 가지고 온 아이스크림까지. 이틀 동안 금세 친해진 양쪽 대표단들은 분단이라는 단어는 알지도 못한다는 듯이 낄낄거리며 낮술에 취해 있었는데 이십대 초반의 접대원 동무들이 노랠 하나 하겠다고 일어서며 한마디 한다. “처음 뵙는 분들인데 전혀 남 같지 않고 친척 어른들 같슴다. 또 놀러오시라요. 노래 하나 하갔슴다.” 통일을 염원하는 그들의 구슬픈 노래도 사람을 환장하게 했지만 친척 어른들 같다며 또 놀러오라는 그 어린 여자의 말에 북쪽에 친척 하나 없는 나는 콧등이 시큰해진다. 노래가 중간쯤 흘러갔을까 아까운 고기는 타들어가는데 우리 일행들 모두 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너무 먹어서 힘들어 죽겠다고 엄살을 피우는 우리들에게 서옥선 선생이 한마디 농을 던졌다. “죽자 살자 해도 먹자가 최고란 말임다.” 우리 모두는 뒤로 넘어갔다. 최고의 코미디는 최고의 비극을 안고 있다고 하지 않던가. 눈물을 찔끔거리며 웃었지만 우리 방북의 목적이 바로 그 ‘먹자’ 때문이라는 생각에 또 가슴이 시리다.

셋째 날인 6월1일은 마침 북의 최대 축제 중 하나인 아동절이어서 만경대 유희장에서 대대적으로 열린 운동회에 참석했다. 생애 처음으로 본부석에도 앉아보고 계주에 참가해서 부상으로 도자기도 탔다. 네살배기 아이들조차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낯설었다. 본부석 저쪽엔 북송된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앉아 계셨지만 따로 인사를 드릴 기회는 없었다. 그들의 남은 인생에 평안만 있기를 조용히 기도했다.

옥류관에서 먹은 냉면은 너무 기대가 커서 그런지 생각보단 별로였지만 냉면을 먹으면서도 ‘세상에! 내가 평양의 옥류관에서 북녘 동포들과 냉면을 먹고 있다니’ 하는 생각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옥류관에서 나와 정식 등록되었다는 ‘김일성화 김정일화 전시관’을 잠시 둘러본 뒤 드디어 대동강 빵공장을 방문했다. 생각보다 규모도 작고 환경도 열악했지만 거기서 생산된 빵을 직접 먹어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실무자 회의를 해보니 예상보다 심각한 문제들이 많아서 돈 몇푼 보내놓고 잘되고 있겠지 했던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남과 북이 함께 직접 만나서 사업을 한다는 것이 너무 뿌듯하고 통일이 별건가 이렇게 자꾸 사업을 핑계로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방법이 생기겠지 하는 순진한 믿음도 생겨났다.

평양의 우상, 서울의 우상

그들의 안내 마지막 코스인 평양 산원, 창광 유치원과 김정숙 탁아소를 셋째 날과 넷째 날에 걸쳐 방문했다. 모든 인민이 곧 국가산업의 노동력이기 때문에 국가가 아이를 키워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라 할 수 있겠지만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아직은 전쟁과도 같은 우리나라 여성들을 생각하니 부럽기 한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걸음마를 갓 뗀 아이들에조차 한 개인을 우상화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는데 나중엔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다시 이곳. 인천공항을 빠져나온 버스 차창 밖 풍경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극과 극을 짧은 시간 안에 경험한 것은 내 정신에 묘한 소격 효과를 가져왔다.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서울에서 먹는 경험을 한 내 눈에 비친 서울의 온갖 광고판들은 또 다른 우상을 찬양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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