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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로맨스를 카메라에 담다

등록 2005-04-07 00:00 수정 2020-05-03 04:24

아이를 업고 다큐멘터리 <엄마…>를 찍으면서 둘째까지 임신한 류미례 감독의 영화 이야기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그를 만나려면 서울 봉천동의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한다. 가파른 언덕을 지나면 계단을 올라야 한다. 1층의 관악장애인직업재활센터, 3~4층의 위기가정센터, 5층의 가출청소년쉼터를 지나면 그의 집이 나온다. 다큐멘터리 <엄마…>를 만든 류미례(34) 감독의 집은 ‘봉천동 나눔의 집’ 건물에 있다. 남편이 성공회 신부여서 성공회가 운영하는 ‘나눔의 집’에 살고 있다. 그의 집에 들어서자 두살배기 아들 한별이가 먼저 손님을 맞았다. 엄마는 집안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 여기가 ‘함께 사는 새장’이군요.” 인사 대신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건넸다. 그가 웃음으로 대답했다. ‘나눔의 집’에서 운영하는 관악장애인직업재활센터 ‘함께 사는 세상’을 다룬 그의 다큐멘터리 <친구>에는 한 장애인이 받아쓰기를 하면서 ‘함께 사는 세상’을 ‘함께 사는 새장’으로 잘못 쓰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엄마가 차를 내오는 동안 한별이가 아장아장 걸어다닌다. “하은이는 어디 갔어요?” 그의 작품 <엄마…>에 나오는 다섯살배기 딸 하은이의 안부를 물었다. “놀이방 갔죠.” 장애와 가족, 그가 찍어온 다큐멘터리의 주제다. 그는 아이들을 키우고 장애인과 어울리며 작품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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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출연을 빼달라고 요구한 둘째언니

<엄마…>는 그가 세 번째로 감독한 다큐멘터리다. 지난 3월 극장에서도 상영됐다. 이 작품은 2003년 제5회 서울여성영화제 옥랑상(댜큐 사전제작 지원작) 수상작이다. 영화 내용은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류 감독의 어머니는 홀몸으로 4녀2남을 키우면서 장한 어머니상을 두번이나 받았다. 그런데 나이 육십이 넘은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다. 류 감독은 엄마의 로맨스를 카메라에 담았다. <엄마…>의 앞부분에 나오는 제작 동기가 재미있다. “아이를 업고 할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라나. 당시 류 감독은 첫딸 하은이가 너무 어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엄마를 ‘이용’한 것이다.

물론 파란만장한 가족사는 그 자체로 훌륭한 다큐멘터리 소재였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도 파란만장했다. 오빠는 엄마의 로맨스를 못마땅해했고, 큰언니는 엄마에게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둘째언니는 가족들이 자신을 험담하는 장면을 보고, 자신의 출연분을 모두 빼달라고 요구했다. 다큐멘터리도 ‘산’으로 가고 있었다. 당초 엄마의 로맨스가 소재였으나 자꾸 자매의 이야기로 영화가 흘러갔다. 류 감독은 러시아에 사는 셋째언니에게 ‘매혹’당했다. 가정을 돌보느라 10년 공부를 접은 언니의 현실이 감독의 미래처럼 보였다. 공포스러웠다. 류 감독은 “나도 언니처럼 포기할까봐 두려워 자꾸 언니의 이야기에 매달리게 됐다”고 돌이켰다. 결국 <엄마…>는 엄마의 로맨스에서 출발해 길을 잃었지만, 자매의 이야기로, 여성의 미래로 확장됐다. <엄마…>는 가족의 씻김굿 구실도 했다. 가족들이 가슴에 묻어두었던 속내를 풀어낼 기회였던 것이다. 류 감독은 “솔직히 엄마를 이해하지만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다큐멘터리를 찍고 나서 엄마가 사랑스러워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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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어머니와 남자친구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류 감독은 “할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어머니를 인사시키기도 했다”고 전했다. <엄마…>에서 할아버지는 이모의 식당에서 엄마를 만나지만 가족들에게 소개하지 않았다. 자칫 나쁜 딸로 비칠지 몰라 걱정했던 큰언니는 오히려 담담했다. 오빠는 “네가 가부장제 같은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며 실망했다. 가족들은 비판했지만, 관객들은 호평했다. 무엇보다 “내 이야기 같다” “우리 엄마는 더하다”는 반응이 좋았다. 류 감독은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나도 저렇게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카메라를 든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다큐는 장애인들의 거울

그는 자신을 “실패한 경험자”라고 겸손해하지만, <엄마…>에는 자신의 삶이 담겨 있다. <엄마…>는 또 다른 선물도 안겨주었다. 첫딸을 업고 할 수 있는 작업이어서 시작한 <엄마…>를 찍으면서 둘째를 임신한 것이다. 류 감독은 “출산일은 다가오고, 편집은 끝내야 하고 막판 초치기가 숨막혔다”고 돌이켰다. 영화를 찍으면서 임신한 ‘전력’은 예전에도 있었다. 첫딸은 두 번째 다큐멘터리 <친구>를 찍으면서 생겼다. 주변 사람들은 “네 번째 다큐멘터리 할 때는 임신하지 마라”고 놀린다.

류 감독은 비장애인으로 장애인 다큐멘터리를 찍어왔다. <엄마…> 이전에 감독한 <나는 행복하다>와 <친구>는 모두 ‘함께 사는 세상’의 정신지체 장애인들 이야기다. 그의 다큐멘터리 속 장애인들은 장애를 극복한 헬렌 켈러도 아니고, 장애에 갇힌 불쌍한 사람들도 아니다. 그저 ‘친구’처럼 친근하고, 때로 ‘나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나는 행복하다>에는 연애하는 장애인들의 좌충우돌이 담겨 있고, <친구>에는 도둑질한 장애인을 다른 장애인들이 용서하는 이야기도 담겨 있다. 그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면 장애를 가진 ‘그들도 우리처럼’ 살아간다고 느끼게 된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장애인에게 거울 구실을 했다. 자신이 나오는 장면은 스스로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도벽이 있던 장애인은 도벽이 없어졌다. 장애인 가족들도 자신의 아들딸이 장애인센터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잘 알게 되었다. 그래도 류 감독의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친구에게 알려준 비밀을 남에게 알리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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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그의 렌즈뿐 아니라 삶도 장애와 밀착됐다. 류 감독의 세 작품에는 모두 남편, 유찬호 신부가 등장한다. 2000년 <나는 행복하다>에서는 장애인센터의 “전도사님”으로, 2001년 <친구>에서는 “부사제님”으로, 2004년 <엄마…>에서는 “남편”으로 ‘역할’을 바꿔가며 나온다. 류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장애인센터의 책임자인 유 신부를 만났다. 당초 혼자 살 생각이었던 류 감독은 유 신부가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다 집을 나온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장애인과 함께 사는 세상에서 살게 됐다. 류 감독은 요즘 ‘장애 코드로 문화읽기’ 모임도 운영한다. 장애인의 시선으로 대중매체를 분석하는 모임이다.

노동운동 꿈꾸다 영화감독으로

류 감독은 영화감독을 꿈꾸지 않았다. 그의 꿈은 노동운동이었다. 그의 꿈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뒤늦게 스무살의 홍역을 앓았다. 월간 <민족예술> 기자로 일하다가 우연히 김명준 감독의 다큐 강좌를 듣게 됐다. 새 세계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영상으로라도 노동운동에 기여하고 싶었다. 하지만 김명준 감독이 있었던 노동자뉴스제작단에 들어가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노동문화정보센터에서 비디오 배급일도 해보았지만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류 감독은 “그래도 ‘노동’이 들어가는 이름만 쫓아다녔다”고 돌이켰다. 결국 1998년 독립다큐집단 ‘푸른영상’에 들어갔다. 그는 “들어가 보니 나 같은 ‘리버럴’에게는 푸른영상이 체질이었다”고 웃었다. 그리고 장애로, 여성으로 시야를 넓혀왔다. 그는 “내가 과연 변했는지 끊임없이 고민한다”며 “아직 꿈을 포기하지도 잊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나눔의 집’을 나서려는데 류 감독의 엄마가 들어왔다. 그는 아들을 업고 엄마를 맞이했다. 삼대가 엄마의 새 집을 보러 갈 예정이었다. 엄마의 얼굴은 여전히 화사했다. 류 감독은 앞으로도 아이를 업고, 엄마의 손을 잡고, 카메라를 들 것이다. 늦깎이 여성주의자로, 장애인의 친구로 살아갈 것이다. 류 감독은 “열심히 사는 만큼 영화도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주부터는 푸른영상에 다시 나가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순간 얼굴이 살짝 들떠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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