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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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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뚱해서 더 매력적인 그녀!

등록 2005-04-07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한국 최초 ‘빅 위민 패션쇼’ 모델 중 한명으로 참여하는 양미경씨의 끼와 열정, 자신감을 보라</font>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봄볕이 따사롭던 3월29일 낮 서울 덕수궁 뒤편 시립미술관 앞길에서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지나던 차와 사람들은 잠시 멈춤 상태가 되고, 미 대사관저로 가는 길을 지키던 전경들의 눈은 휙휙 돌아갔다. ‘조정린스러운’ 한 여자가 나타나 난데없이 섹시한 춤과 화려한 워킹을 선보였던 것이다. 그 여자쪽을 향해 서 있던 전경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다른 쪽을 향하고 있던 전경들은 차마 몸은 못 틀고 고개와 눈알만 째지게 돌렸다.

기본은 77사이즈… 88·99사이즈도 대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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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마케팅도 아니고 관광 나들이도 아닌데 한 젊은 여자가 백주대로에서 노래부르며 춤춘다는 건, 드문 일이다. 양미경(26)씨는 아랑곳 않고 사진기자의 카메라 앞에서 전문모델 뺨치게 폼을 잡았다. 그는 4월9일 사상 최초로 열리는 ‘빅 위민 패션쇼’에 출연하는 모델 중 한명이다. 양씨는 “사람보다 치수를 더 중하게 여기는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항의의 뜻을 담고 있지만, 이 행사의 더 중요한 이유는 뚱뚱한 여자도 아름답고 당당하고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는 것”이라며 “뚱뚱한 여자라는 표현에는 비하의 뜻이 담겨 있어 ‘빅 우먼’이라 한 것 같은데 손발 큰 여자도 빅 우먼이니 ‘통 큰 여자’라는 표현이 더 좋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설에 예쁜 설빔 하나 주문하고 싶어 평소 애용하던 큰옷전문 온라인 사이트에 들렀다가 패션쇼 공고를 보게 됐다. ‘큰 것이 아름답다’(Big is butiful)를 모토로 내걸고 한국여성재단이 주최하고 (주)큰옷(www.big2big.co.kr)이 주관하는 행사였다. 나이와 직업은 상관없지만 끼와 열정, 자신감을 가진 여자라야 응모할 수 있었다. 대신 반드시 77사이즈 이상을 입는 여자여야 했다. 88사이즈, 99사이즈는 대환영이었다. 고교 때부터 뮤지컬로 단련된 무대 매너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패션 감각을 자랑하는데다 기성복 시장에서는 맞는 옷을 찾기 힘든 양씨였기에, 무릎을 탁 쳤다. 이거 나네. 부랴부랴 휴대전화로 사진 찍어 올리고 한달음에 달려와 지원서도 냈다.

수백명의 응시자 가운데 서류심사에서 60명을 걸러 개별 면접을 거쳐 최종적으로 스무명을 뽑았다. 자리에 서서 상체를 그대로 뒤로 내려 아치 형태를 만들 정도로 유연한 몸놀림과 춤솜씨, 노래실력에 더해 치매 할머니 연기까지 선보인 양씨도 그 중에 끼었다. 지난 3월19∼20일 경기 양평에서 열린 합숙 훈련장은 전국에서 온 통 큰 학생, 주부, 직장인들이 발산하는 끼로 후끈 달아올랐다. 양씨는 “나도 한 끼 하는데,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고 했다. 아니 이 여자들이 대체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지?

이들은 도처에 있었지만 세상은 애써 외면했다. 날씬한 여자와 비교 대상으로만 등장시켰을 뿐이다.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잔소리를 일삼거나, 대놓고 무시하거나, 때론 폭력적인 언사까지 마구 저질렀다. 전철에서 학생이 자리를 비켜주는 통에 임신부처럼 굴어야 했던 적이 있는 여자, 택시를 탔다가 바지가 튿어진 적이 있는 여자, 우아한 식당에서 의자에 앉다가 청바지 단추가 수m 전방으로 튕겨져나간 적이 있는 여자들은, 다 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걸. ‘넌 지금이 보기 좋아, 빼지 마’족과 ‘넌 빼지 않으면 안 돼, 늦기 전에 빼’족이다. 거짓말쟁이이거나 참견쟁이다. 왜 내 살들이 당신들의 품평 대상이 돼야 하는가. 성격 나쁜 여자는 용서되지만 뚱뚱한 여자는 용서되지 않는다고? 내가 세상에 무슨 해 끼친 게 있나? 왜 남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존재여야 하는가. 가까운 사람들마저 “너 시집은 어떻게 갈래?” “나니까 너 만나준다” “살만 빼면 남자 소개해줄 텐데”…. 단지 뚱뚱하다는 이유로 왜 한 자연인의 연애를 자기들이 관장해야 한다고 믿는단 말인가. 뭐니뭐니 해도 열받는 순간은 삐쩍 마른 친구가 “난 암만 먹어도 살이 안 쪄. 살 좀 쪘으면 좋겠다”고 할 때다. 한술 더 떠 걔보다 더 마른 애가 옆에서 “나 살쪘지? 어쩜 좋아. 여기 허리 잡히는 거 봐” 이러면서 아기 새끼손가락만 한 살집을 쥐고 징징댈 때다. 이런 지경이니 “체중 감량이 필요한 사람은 자포자기하게 만들고 체중 감량이 필요 없는 이들만 다이어트로 스트레스받게 하는”(<살에게 말을 걸어봐> 중에서) 사회가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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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씬해도 우울해요? 뚱뚱해도 쾌활해요”

양씨의 내력도 파란만장하다. 대학에서 관광을 전공한 그는 호텔 입사 최종 면접에서 퇴짜를 맡기도 했다. 맞는 유니폼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마른 애랑 뚱뚱한 애가 사이좋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옆에 가던 친구가 “와, 저런 애들이 어떻게 친구가 됐지?”라고 말하는 걸 듣기도 했다. 옷가게 점원에게 “언니한테 맞는 옷 없어요”라는 소리를 듣고 구경도 못한 채 쫓기듯 나왔던 적도 있다. 노란색 티셔츠를 고르면 “이게 낫다”며 검고 칙칙한 색의 옷을 건네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우리의 양씨. 덜떨어진 애들에겐 ‘내겐 너무 뚱뚱한 그녀’였을지 몰라도 잘 아는 이들에겐 ‘내겐 너무 끼 많은 그녀’다.

삼남매 가운데 고명딸로 사랑을 듬뿍 받은 통에, 어릴 때부터 자기가 뚱뚱하다고 인식하지 못하며 자랐다. 덕분에 주눅들고 기죽지 않았다. 중학교 때는 합창단과 응원단을 두루 섭렵하고, 고교 때는 기성 극단에 들어가 뮤지컬을 시작했다. 고교 2년 때는 교장 선생님이 “서태지 은퇴를 막기 위한 자살특공대에 낀 건 아니지요?”라는 전화를 부모님께 할 정도로 공사다망하게 살았다. 오지랖도 넓다. 친구가 우울하면 길 가다 딱따구리, 저팔계, 오리 흉내를 내며 웃긴다. 전 직장의 같은 건물에서 일하던 미용사가 독립해 개업하자, 서울 서쪽에서 동쪽 끝까지 머리 하러 다닐 정도로 의리도 지킨다. 사람 좋아하고 조명 받는 게 체질이다 보니 한때 일했던 관광회사에서 ‘스타 안내원’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지금 일하는 꽃 이벤트 전문회사에 3월 말 첫 출근을 했지만 사장님을 용케 구워삶아(양씨의 표현으로는 “사장님의 배려”로) 4월9일 패션쇼까지 근무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론 출연과 연습 참가를 맘껏 할 수 있게 됐다. 양씨의 주장은 이거다. “날씬해도 우울한 사람이 있고, 뚱뚱해도 쾌활한 사람이 있다. 쾌활한 사람은 주변을 환하게 한다.”

편견에 갇힌 사람들이 불쌍하다

양씨는 게다가 진심으로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한다. 그런 탓에 “살 빼면 남자 소개해주겠다”는 말 단칼에 거절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과 더 행복해지려고 살을 뺄 용의는 있지만, 그런 사람 만나기 위해 살을 빼는 건 내 살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기 때문이란다. 거꾸로 “통통해서 네가 좋다”는 남자도 사절이다. 사람보다 치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트럭으로 줘도 트럭만 갖고 버리겠다는 배짱이다. “정말 불쌍한 사람들은 편견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죠. 전 그래요. 그래 니들은 그렇게 좁게 살아라, 난 넓게 살란다.”

양씨가 준비하는 패션쇼는 1부 패션쇼에 이어 2부에는 참가자들의 온갖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컬트적이리라 기대해선 곤란하다. 정식 패션쇼와 똑같은 디자인과 원단의 옷을 치수만 늘려 맞췄고, 전문가의 도움으로 워킹까지 맹렬 연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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