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시댁에게 괴롭힘 당해도 구제받기 힘들어…국적 취득 어렵고 기초생활보장조차 못 받는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2004년 한해에만 한국 남성과 결혼한 필리핀 여성이 994명에 이른다. 중국, 베트남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수다. 국제결혼 필리핀 여성은 해마다 빠르게 늘고 있다. 필리핀 여성들은 결혼상담소 또는 종교단체를 통해서 한국 남성과 결혼한다. 하지만 필리핀 여성들에게 한국의 가부장 문화는 낯설다. 필리핀은 양성평등의 전통이 강해 다른 아시아 국가 출신들보다 더욱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단지 남편의 구타만 문제가 아니다. 시댁에서 구박당하고, 국가에 차별당하는 필리핀 여성들의 호소가 늘어나고 있다.
‘남편의 보증’이 국적의 열쇠
지난 2월1일 오후 서울 성북동의 한 빌라에는 필리핀 여성들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가톨릭 서울 대교구에서 운영하는 필리핀 이주노동자 사목 상담소다. 국제결혼을 해서 한국에 왔지만 남편과 헤어진 여성들을 보호하는 쉼터 역할도 하고 있다. 주말이면 필리핀 국제결혼 여성으로 가득 찬다. 이날 쉼터에는 소냐(29·가명)와 안젤리나(31·가명)가 서명 용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국제결혼 이주여성에게 국적 취득을 쉽게 해줄 것을 요구하는 서명 용지다. 두 필리핀 여성은 현재 남편과 별거 중이다.
소냐는 2000년 2월 한국으로 시집왔다. 종교단체가 남편을 소개했다. 경기도의 시골에서 아홉살 차이 나는 남편과 일흔살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남편은 직업이 없었고 항상 몸이 아프다고 했다. 그는 보청기를 낄 만큼 청력도 좋지 않았다. 2001년 소냐는 딸을 낳았다. 남편은 가끔 술주정을 부리기는 했지만 구타를 하지는 않았다. 정작 그를 괴롭힌 것은 시어머니였다. 시어머니는 걸핏하면 구박을 했다. 소냐는 남편을 “마마 보이”라고 표현했다. 남편은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어머니의 편을 들었다. 시어머니와 잘 지내고 싶었지만, 도저히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소냐는 영어밖에 하지 못하고, 시어머니와 남편은 영어를 거의 못했다. 물론 문화 차이도 심했다. 소냐는 시어머니가 뭔가를 시킬 때마다 긴장해서 허둥대기 일쑤였다. 날로 갈등은 심해졌지만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소냐는 2003년 집을 나왔다.
소냐는 서울의 플라스틱 공장 등을 전전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 딸이 너무 보고 싶어 지난해 딸의 생일에 남편 집을 찾아갔지만 시어머니는 방문을 잠가버렸다. 딸은 방 안에서 울고 있었다. 시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애원을 했지만 시어머니는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소냐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데다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상담소에 머물고 있다. 소냐의 비자는 이미 만료 시한이 지난 상태다. 한국에서 결혼하고 5년을 살았지만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 소송을 하고 있다. 하지만 국제결혼 이주여성이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서는 한국인 배우자와 2년 이상 결혼 생활을 하고, 배우자의 보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남편의 보증’은 국적 취득에 필수 조건이다. 만약 남편이 보증을 해주지 않는다면, 이혼 사유가 남편에게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땅에서 구타나 구박을 증명해줄 증인을 찾기가 어려워 귀책 사유를 입증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남편이 먼저 가출 신고라도 하면 더욱 불리해진다. 가출한 아내에게 국적을 주지 않기 위해 보증 제도를 악용하는 남편들도 적지 않다.
정부차원에서 국제결혼 여성 교육해야
소냐는 마음을 졸이며 비자를 기다리고 있다. 소냐의 소원은 딸과 함께 사는 것이다. 소냐는 “내 딸이 사니까 한국에 살고 싶다”며 “꼭 ‘시티즌십’을 얻어야 한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몸이 불편했던 남편은 최근 뇌암 판정까지 받았다. 소냐에게 “그래도 남편과 같이 살고 싶냐”고 묻자 “예스”라고 답했다. 하지만 소냐는 이내 “시어머니가 무섭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같은 쉼터에 머물고 있는 안젤리나는 임신 5개월째다. 2004년 9월 임신 사실을 모른 채 집을 나왔다. 부산으로 시집온 지 4개월 만이었다. 남편은 술에 절어 살았고, 술만 마시면 그를 때렸다. 시댁 식구들의 냉대도 이어졌다. 심지어 손위 동서에게 맞기도 했다. 남편의 구타와 시댁의 구박을 견디지 못해 안젤리나는 집을 나왔다.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안 안젤리나는 전화로 남편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남편은 묵묵부답이었다. 만나러 오겠다는 소식도 없다. 한국에 온 지 9개월밖에 안 된 소냐는 국적 취득 신청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그저 상담소에 ‘얹혀’ 살면서 출산을 기다리고 있다. 가톨릭 신자여서 아기를 뗄 생각도 없다. 상담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양승걸(56)씨는 “아이가 있어도 아버지가 누구냐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하다”며 “최소한 2년이 지날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답답해했다. 한국 정부의 제도적 차별은 국적 취득에서 끝나지 않는다. 국제결혼 배우자는 한국인 배우자의 잘못으로 이혼 또는 별거를 하더라도 기초생활보장조차 받을 수 없다. 현행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는 기초생활 수급권자인 한국인 남편과 결혼했을지라도 국민배우자 비자(F-2-1)를 가진 외국인 여성들은 기초생활 수급권자에서 제외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냐와 안젤리나는 집에 송금을 해야 하는 형편은 아니다. 대부분의 필리핀 여성들은 송금을 조건으로 한국에 시집을 온다. 하지만 막상 한국에서 송금 이야기를 꺼내면 면박당하기 일쑤다. 오히려 시댁 식구들에게 “얼마를 주고 사왔는데 또 돈을 요구하느냐”며 구박을 당한다. 결혼상담소는 주로 필리핀 시골에서 여성을 모집하면서 한국에 가면 송금을 할 수 있다는 거짓 정보를 유포한다. 그래서 남편의 직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한국인과 결혼하는 필리핀 여성들도 많다. 뒤늦게 현실을 깨달아도 이미 늦은 상황이다. 게다가 한국어, 한국 문화, 자녀 양육법에 대한 정부 차원의 교육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가톨릭 서울교구 혜화동 성당 필리핀 사목센터의 글랜 신부는 “정부 차원에서 국제결혼 여성에 대한 교육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며 “특히 시골로 시집가는 이주여성의 경우는 한국 문화에 대한 교육이 더욱 절실하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필리핀 여성의 비극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03년에는 결혼 생활 8년 동안 구타에 시달린 필리핀 여성이 자살한 일도 벌어졌다. 그는 남편이 흉기로 얼굴을 찔러 상처를 입은 채 10층 건물의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필리핀 정부는 대책 마련에 나서는데…
사태가 심각해지자 필리핀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섰다. 필리핀 당국은 올 1월 말 한국 남자와 국제결혼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공문을 만들어 한국 거주 필리핀 여성들에게 긴급 회람시켰다. 알라딘 G 빌라델코 주한 필리핀 대사는 공문에서 “한국 남자와 결혼하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한국에 온 필리핀 여성들이 결국 술집과 클럽에 넘겨져 비참한 처지에 처한 경우를 종종 봤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이에 앞서 필리핀 국가수사국(NBI)은 1월 중순 우편주문신부(Mail-order bride) 알선업체를 운영한 혐의로 6명의 한국인 남성과 5명의 필리핀 여성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이제 한국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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