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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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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 스님의 목숨이 기운다

등록 2005-01-19 00:00 수정 2020-05-03 04:24

천성산 터널공사 환경영향 재평가를 요구하며 80여일째 곡기를 끊은 그의 지독한 소망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지율 스님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곡기를 끊은 지 80여일. 단식은 원래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단군 이래로 ‘목숨을 건’이라는 수식어는 끝끝내 수식어였을 뿐이다(전두환의 감옥에서 단식을 하다 숨진 광주의 아들 박관현의 예외가 있다). 그런데 정말 ‘목숨을 건’, 아니 ‘목숨을 버리는’ 단식을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힌다. ‘어쩔 수 없는 일’을 수긍하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스님의 단식은 설명하기 힘든 불편함을 안겨준다. 어쩌자고 스님은 고집을 부리는 걸까. 1월11일 단식 77일째, 서울 종로통의 스님 방을 찾아갔다.

“노무현 정부를 동정한다”

스님이 합장으로 맞이했다. 스님은 앉자마자 노트북을 열었다. 첫 화면에 등불 하나가 깔려 있다. 외롭게 퍼지는 희미한 빛이 스님의 생명 같았다. 스님이 천성산 홈페이지(cheonsung.com)를 열었다. 노래가 흘러나왔다. “너를 사랑하고도 늘 외로운 나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이고~ 어두운 방구석에 꼬마 인형처럼….” 세인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스님의 현실이 겹쳐졌다. 스님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천성산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천성산 22개의 늪지, 12개의 계곡이 눈앞에 펼쳐졌다. 스님은 풍경을 설명하다 탄식하듯 “나 같은 사람은 백번 죽었다 백번 태어나도 물줄기 하나 못 만들지요”라고 말했다. 스님은 언젠가 “저를 보지 말고 천성산을 보아주세요”라고 호소했다. 그 말의 묵묵한 실천이었다.

“스님, 제발 져주십시오.” 천성산 게시판에는 간구하는 목소리가 가득하다. 그 호소를 대신했다. 스님은 “너무 많이 졌어요. 물러날 자리가 없는걸요”라고 답했다. “먼 미래를 생각해주십시오.” 또 다른 간구의 목소리를 대신했다. “이것이 미래고, 현재고, 과거예요.” 스님의 입가에 단호한 미소가 번졌다. 우문현답 끝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리고 스님의 글이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단식을 중지해줄 것을 제게 요청합니다. …제가 보고 느끼는 것은 절망을 미래에 옮겨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율 스님과 천성산은 한 몸이다. 스님과 함께 천성산 지키기 운동을 했던 소설가 김곰치는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 스님과 천성산의 관계를 이렇게 비유했다. “전태일이 몸에 불을 붙이고 병원에서 숨을 거두자 이소선 여사는 실신해버렸고, 그새 이 여사를 노동청 직원들이 집에 모셔갔는데, 눈을 뜨자마자 그녀는 부엌 식칼을 들고 ‘내 아들 곁으로 가는데 길 막는 놈은 누구든 쑤셔버린다’고 했다지요. 이 여사처럼 스님도 능히 그럴 분이십니다.” 지율 스님은 단식을 하면서도 “말라가는 것은 내가 아니라 산과 샘”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스님의 단식은 천성산을 넘어섰다. 천성산에 대해 묻자 “사실 천성산은 어떤 의미도 아니에요. 우리가 살아왔던 것에 대해 반성한다는 뜻에서 천성산이 나한테 의미가 됐던 거죠”라고 말했다. 천성산을 지키기 위해 천성산의 절집을 나왔지만, 지켜야 할 것은 천성산만이 아니었다. 스님은 “저는 천성산 문제를 통해 자연이 병들기 전에 병들어버린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절집을 나와 속세를 떠돈 지 4년. 깨진 약속과 무너진 원칙은 스님에게 윤리의 십자가를 지게 만들었다.

스님은 “노무현 정부를 동정한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와 스님의 인연은 2002년 말에 시작됐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천성산 터널 백지화 공약을 내걸었다. ‘좋은 인연’은 딱 거기까지였고 ‘슬픈 인연’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의 공약은 헛공약이 되었다. 스님이 단식을 하자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이 찾아와 “믿어달라”고 읍소했다. 하지만 믿음도 지켜지지 않았다. 곽결호 환경부 장관도 환경영향평가에 합의했지만, 3일 만의 평가로 이상 없음 판정을 내렸다. 정부의 약속은 깨졌고, 환경단체의 원칙도 무너졌다. 일부 환경단체는 노선 재검토위원회에 참여해 정부에 면죄부를 주었다. 최후의 보루인 법원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11월29일 부산지법에서 천성산 도롱뇽 소송은 패소했다. 130개 단체가 모였던 천성산 지킴이는 해체됐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남들은 “어쩔 수 없다”고 포기했지만…

스님은 그때가 지금보다 힘들었다고 돌이켰다. 함께 하던 사람들조차 ‘희망’을 버렸기 때문이다. 단식 80일째도 꼿꼿했던 스님이 그때는 몸져누웠다. 스님은 당시의 심정을 “항고심 패배 이후 사람들은 결과 앞에 무너지고 떠나갔으며, 저는 그 빈자리에 남아 소리 내어 울 수도 없었다”라고 돌이켰다. 불교계의 스님들조차 ‘이제는 그만 놓으라’고 했다. 끝끝내 희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박영관 부산시 교육위원은 “환경단체, 시민단체는 현실적 가능성을 생각하지만 스님은 절대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다”며 “주변 사람들이 스님을 못 따라가서 어려울 때도 있다”고 전했다.

단식을 하면서 고비도 있었다. 70일째를 갓 넘긴 1월2일께 위기가 찾아왔다. 천성산을 400번 오르내리며 만든 영상물 자료인 <초록의 공명>을 완성한 뒤였다. 스님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해서인지 몸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당시 스님 곁을 지켰던 박영관 위원은 천성산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스님 말씀이 ‘70일 굶었으니 이제 죽을 때’란 생각을 하니 정말 죽을 것처럼 기력이 떨어졌지만, ‘아직은 살았으니 사는 것처럼 살자’라고 생각을 바꾸니 몸도 살아나더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사나흘을 누웠다가 다시 일어났다.

7일에는 한의사가 다녀갔다. 한의사는 “생은 사의 영역에 있고, 정신은 생의 영역에 있다”고 말했다. 형형한 정신이 스러진 몸을 지탱하고 있지만, 언제 위기가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지인들에 따르면, 간장물을 조금만 많이 마셔도 곤욕을 치르고, 혓바닥 비늘이 살점처럼 떨어지고, 껌이 입안에서 녹아내린다. 그래도 스님은 단식을 중단할 생각이 없으시다. 오히려 그는 “한의사가 사람이 공포 탓에 죽지 배고파서 죽지는 않는다고 했다”며 “공포를 조금씩 극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영관 위원도 “정신적인 충격만 없다면 90일, 100일도 견디실 것 같다”고 말했다.

스님을 만나는 도중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이 들어왔다. 스님 좀 말리라고 채근하자 “고집쟁이라서 말을 듣습니까”라고 대꾸한다. 김종철 선생은 “방법은 나쁘지만 스님 같은 영혼이 어디 있습니까”라며 웃었다. 김종철 선생은 지율 스님의 지독한 소망에 감탄했다. “스님은 정말 천성산은 절대 뚫리지 않는다는 100%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 이게 너무 놀랍습니다. 나조차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거든요. 현실 논리를 비판하지만 현실이 참을 만하기 때문에 목숨을 걸지 않는 거죠. 사실 우리가 타락의 길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타락을 즐기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다 망하지 하면서도 목숨 바쳐서는 못합니다. 스님은 진정으로 이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지독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목숨을 거는 거죠”.

새만금을 새의 이름으로 알던 사람

김종철 선생은 안타까운 얼굴로 스님을 살릴 방법이 없겠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그는 정부의 무관심에 대해 “민주적인 정부일수록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며 “여론이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난받을 가능성도 감수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김종철 선생과 얘기를 나누면서 스님의 얼굴이 밝아졌다. 스님은 “내가 선방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으니까 산이 나를 부른 것 아니겠느냐”며 “쓸모없으니까 귀신도 데려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님은 노련한 운동가가 아니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운동의 ‘운’자도 몰랐다. 새만금을 새의 이름으로 알던 사람이었다. 천성산 제2봉우리 내원사의 선방 스님이었다. 내원사의 산감이라는 소임을 맡아 사찰 주변의 숲과 생명을 보호하는 일을 했다. 2001년 4월 어느 날, 외출해서 돌아오던 스님은 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포클레인이 굉음을 내며 산을 깎고 있었다. 천성산 관광도로 공사였다. 스님은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스님의 싸움은 그렇게 시작됐다.

도로공사에 이어 터널공사가 들이닥쳤다. 스님은 공사를 막기 위해 포클레인 삽날에 몸을 던지고, 거리에서 3천배를 했다. 2003년 3월부터 35일, 45일, 58일 끝없는 단식이 이어졌다. 이번 ‘58+’ 단식까지 합치면 1월14일로 단식일만 220일이 넘었다. 그사이 천성산을 400번 오르내렸다. 천성산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서 사진을 배웠고, 그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서 인터넷도 익혔다. 환경 공부도 하고 법률책도 뒤적였다. 하지만 스님은 지금도 전태일이 누군지, 국가보안법이 어떤 법인지 잘 모른다. 누군가 스님을 전태일에 비유해서 인터넷으로 찾아봤을 정도다. 박영관 위원은 “사안, 사안은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은 대단하다”고 말했다. 도롱뇽 소송 아이디어도 지율 스님의 머리에서 나왔다.

지율 스님은 1957년 경남 산청군 색동면 지리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한때 성당과 교회를 다녔다. 박영관 위원은 “내원사의 스님방 책장에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꽂혀 있다”며 “젊을 때부터 근원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던 듯하다”고 전했다. 삶의 근원에 대한 모색은 출가로 이어졌다. 출가하면서 어머니와의 인연도 끊어졌다. 12명의 형제가 있었지만, 6명이 땅으로 돌아갔다. 지인들은 “굴곡 있는 가족사”라고 전했다. 스님이 업어 키운 여동생이 스님 곁을 지키고 있다.

원칙주의자의 원칙은 하나일 뿐

스님과 헤어지면서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단식을 중단하시겠습니까.” 원칙주의자의 원칙은 하나다. “천성산 터널공사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해야지요.” 스님은 “터널공사로 10개의 보존지역과 22개의 늪지가 파괴되고, 단층이 불안해 사고 위험이 큽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정부의 태도는 완강하다. 환경부 산하 낙동강유역환경청이 최근 천성산 터널공사의 환경영향평가 이행을 감시할 민관합동 특별점검팀을 꾸리면서 스님과 천성산 대책위를 배제했다. 스님은 “특별점검팀 구성은 공사 강행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이는 천성산의 수의를 짜는 일”이라고 말했다. 천성산의 수의를 짜는 일은 지율 스님의 수의를 짜는 일이다. 천성산을 살려야 지율 스님을 살린다. 목숨이 기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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