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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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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중년’을 재구성하라

등록 2005-01-12 00:00 수정 2020-05-02 04:24

탱고와 에어로빅에서 스킨스쿠버 다이빙, 드럼까지… 유쾌하고 전복적인 취미를 즐기며 사는 아저씨들

▣ 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1. 가요무대에 채널을 고정하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2. 반 이상 풀린 두루마리 화장지를 보면 내 신세 같다. 남은 세월은 쏜살같을 것이다.

3.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운다는 노래는 이제 듣고 싶지 않다. 그 노래 부르는 아내가 무섭다.

중년 남성들이 이구동성으로 털어놓는 상징적인 ‘중년의 징후들’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렇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지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어느덧 퇴출 위기에 놓여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삶의 꼭지점을 향해 맹렬히 질주해왔던 태도에 회의를 품게 된다. 남자답다는 가치도 이젠 지겹다. 건강에 부쩍 자신이 없다. 나를 이해하고 위로해줄 가족이나 친구가 절실하다. 하지만 주위를 살펴보면 가족도 친구도 이미 너무 멀어져 있다….

‘사추기’를 아십니까

언제부터 이런 징후들이 나타날까. 사회교육학자들은 연령보다는 경험에 따라 좌우되므로 딱 잘라 나이대를 말하기 어렵지만, 대략 38∼45살을 성인 중기(중년기)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때를 ‘사추기’라고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거나 좌절했거나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이미나 서울대 사회교육학과 교수는 <흔들리는 중년 두렵지 않다>(한겨레신문사 펴냄)는 책에서 이 시기를 “사춘기 못지않은 혼돈이 머리를 쳐드는 때”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제까지의 생활방식에 의미를 잃거나 염증을 느낀다는 신호이며, 현재의 신념·습관·주장을 버리고 중년기의 자기 인생을 다시 세우려는 절규”라면서 “이는 쇠퇴의 징후가 아니고 성장의 전조”라고 덧붙였다. 중년 이후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성장통’을 앓는 시기라는 말이다.

‘남자다움’ ‘가장다움’ 혹은 ‘간부다움’에 자기를 맞추느라 감정을 억제하고 업무지향적인 태도를 유지해왔던 남성들에게 ‘아저씨 우울증’은 크고 깊게 다가올 수 있다. 스트레스를 풀 방법도 별로 없다. 그나마 보편적인 게 술이다. 지난해 일본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됐던 ‘일본인이 본 한국인의 특징 100가지’ 중 ‘아저씨’에 대한 묘사는 유독 술과 관련된 것이 많다. 술을 먹으면 종종 거칠어진다, 스트레이트로 마신다, 병뚜껑을 딸 때 병따개 말고 다른 것(라이터, 나무젓가락, 이빨 등)으로 따는 걸 자주 자랑한다, 누가 더 많이 마시고 안 취하는지 경쟁한다 등이다. 이런 아저씨들은 젊은 남자와 외모 경쟁을 하며 마스크 팩을 붙이거나 김치 맛이 변했다고 아내에게 사랑이 식었냐며 투정부리거나 전자기타를 치며 머리 흔들고 악쓰는 광고 속 백윤식(배우)씨가 부럽기만 하다. 한데 아저씨들이라고 늘 이렇게 재미없고 칙칙하게 살란 법 있나?

인테리어 그래픽 디자인 업체를 운영하는 오형권(50·멀티플랜 디자인 대표)씨는 “그렇지 않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아저씨 중 한명이다. 그의 명함은 앞뒷면이 다르다. 앞면에는 회사 이름과 대표 직함이 나와 있고, 뒷면에는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 탱고시티(cafe.daum.net/tangocity)와 헨리라는 별명이 적혀 있다.

8년 전 나름대로 직업적인 성공을 하고 있다고 느낄 즈음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이라는 해일에 된통 휩쓸렸다. 34명의 직원을 뒀던 회사도 하루아침에 부도 위기에 처했다. 건강도 몹시 상해 있는 상태였다. 그때 만난 게 댄스스포츠였다. 아내와 마주 보고 서니 기분이 묘했다. 집 팔아 빚 갚고 밀린 월급 주고 나니 오히려 자유로워졌다. 그는 곧이어 라틴댄스의 세계에 푹 빠졌다. 몸무게도 7kg이나 줄어 가뿐해졌다.

2003년 들어 불황으로 그럭저럭 유지해오던 회사가 다시 어려워졌다. 두 번째의 위기였다. 그는 아예 일을 접었다. 욕심을 버리는 심정이었지만 일을 관두고 나니 관성에 따라 마음은 괴로웠다. 절망감, 자괴감, 무력감 등이 교차했다. 하루에 5시간씩 춤을 췄다. 1년 가까이 그렇게 지내다가 지인의 요청으로 탱고 바를 인테리어하게 됐다. 다시 기운이 났다. 아침에 일을 나가 저녁 때 돌아오는 게 굉장히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규모를 확 줄이고 입에 풀칠할 정도로만” 회사를 꾸렸다. 사업 규모를 키우지 않고 직원들 월급 주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딱 그만큼만 하니 남부러울 게 없다. 시간이 나면 춤 추고 안무를 짠다. 춤 배우기 7년, 탱고 추기 4년째, 틈틈이 원정 공연도 했다. 개인교습 문의도 쏟아져들어온다. 탱고로 ‘노후 대책’도 세워놓은 셈이다.

탱고로 ‘노후 대책’을 세우다

오씨는 “내가 머리카락이 하얘서 그런지 연령대가 있거나 점잖은 모임에 나가서 공연할 일이 많은데, 정말 우리나라 중년 남자들에게는 놀이 문화가 없는 걸 새삼 느낀다”면서 “즐거운 일을 찾기보다는 ‘누가 술접대 안 해주나’ 하고 앉아 있는 이들을 보면 딱하다”라고 말했다. 춤을 배우고 싶은데 여건이나 체면 때문에 망설이는 이들이라면? 오씨는 “그런 이들에게 ‘하지 마세요’ ‘저한테 묻지 마세요’라고 말한다”고 했다. 대신 정말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팁’을 준다. “하체에 힘 생기는 거, 몸이 리듬을 타는 거, 느껴보기 전에는 몰라요.”

1월5일 밤 서울 노원역 근처 지하 연습실. <렛미비데어> 노래가락에 맞춰 쿵작쿵작 드럼 소리가 울려퍼진다. 타고난 드러머처럼 보이는 덩치 좋은 아저씨가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다. 롯데제과 남양주영업소 황대현(43) 소장이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술꾼’이었다. 영업소장이라는 자리는 자칫하면 술통에 빠지기 쉽다. 게다가 타고나길 술을 좋아하니 그야말로 ‘자가 발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데 이 술이 그를 구했다. 3년 전 회사 직원들과 부부동반 야유회를 다녀오다 경기도 마석에 있는 한 카폐에 들어가게 됐다. 얼큰히 취해 있던 차였다. 카페 구석에 드럼이 놓여 있었다. 어릴 적 동네 형님들 연습실에 들락거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술김에’ 채를 잡았다. 아내도 직원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씨 자신도 술 깨고 나서 무척 놀랐다고 한다. “알게 모르게 드럼을 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정신없이 살아오는 동안 잊고 있었던 거죠. 아내가 흔쾌히 동의해줘서 가능했는데, 아마 드럼을 치면 저 양반 술 좀 그만 먹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을 겁니다.”

그가 다니는 곳은 EZ드럼(www.ezdrum.co.kr) 노원클럽이다. 일종의 동호인 연습장으로 서울에만 6곳이 있다. 매월 소정의 회비를 내면 오후 3시부터 밤 10시까지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10대부터 60대까지 멤버의 연령도 다양하다. 황씨가 드럼을 치는 동안 다른 회원들은 드럼 연습용 ‘딱판’을 두드렸다. 황씨의 드럼 예찬론이 이어졌다. 한마디로 “아주 젊어지는” 거란다. 그리고 “음악을 밥벌이로 하는 친구들도 부러워할 정도로 스트레스 확 푸는 수단”이라고 한다. 드럼과 관련해서 인터넷도 뒤지고 동영상도 올리다 보면 “아이들(13·11살)하고도 대화가 트이고 공감대가 넓어진다”고 말했다. 황씨는 “아버지가 이제 칠순이신데, 은퇴 이후의 삶이 무료해 보이고 나도 그럴까봐 겁이 난다”면서 “취미를 갖는 건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말했다. 은퇴 뒤에는 동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황 할아버지의 방과후 드럼 교실’을 열어주고 싶단다. 좋아하는 술을 평생 마시기 위해서라도 드럼으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야 한다는 게 황씨의 지론이다.

스릴 있고 도전적인 취미를 찾아라

6년 전 인터넷 사이트 ‘중년들의 세상’(coreaworld.com)을 만든 이아무개(49·아이디 공공이)씨는 항공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외국에 있는 이들에게 사업 문제나 고국 소식을 전해주자는 소박한 취지로 사이트를 열었는데 “‘중년’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대화에 목마른’ 수많은 중년들이 찾아들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40∼50대 모임으로 시작했는데 너도나도 코너를 만들어달라고 해서 어느덧 30대 후반부터 60, 70대까지 ‘범중년들’의 사랑방이 됐다. 이씨는 “중년이 되면 억압하고 묻어뒀던 ‘소녀의 감수성’이 살아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보통의 중년 문화 가운데 술, 여자 빼면 건전한 걸로는 목욕탕밖에 더 있습니까? 중년 남성들은 ‘대화와 위로’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떤 경험’에 목말라 있는 것 같아요. 여태 그래본 적이 없고 어떤 경험을 시도하는 것도 망설여지니, 더 외로운 거죠. 이렇게 나이를 먹나 불안하기도 하고.”

목마른 중년이 스스로 우물을 파는 법이다. 국회 입법정보연구관 배민식(48)씨는 바다를 찾았다. 4년 전 마흔 중반을 넘어서며 인생이 총체적으로 불안해지고 스트레스가 쌓이는 걸 느꼈다고 한다. 내가 과연 나에게 맞는 길을 걸어온 건지, 이대로 계속 일을 할 수 있는지, 다르게 살 방법은 없는지… 질문들이 마음 밑바닥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왔다. 그는 작정하고 1년 넘도록 스릴 있고 도전의식을 자극하는 취미를 찾았다.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만났다. 농수산 문제가 전공인 자신에게 딱 맞는 취미 같았다. 처음 1년 동안은 꾸준히 배운다는 자세로 수영장에 다녔다. 그가 속한 동호회는 주말마다 서울 올림픽수영장에서 연습을 갖고 한달에 한번씩은 바다로 나간다. 동호인 중에는 아름다운 바닷속 환경에 심취해 환경운동이나, 수중 촬영 등으로 반경을 넓히는 이들도 많다. 배씨는 “여유 있는 사람만 취미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취미를 통해 여유를 찾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중년에 접어들면 구조조정이니 애들 교육이니 건강 문제니 여러 가지가 갑갑하게 다가옵니다. 사회적 안전망이 잘돼 있지 않으니 가장이 모든 걸 감수해야죠. 대한민국의 40대 이후라면 이런 문제 안 느끼는 사람이 있나요. 하다못해 가장이 우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 문화 아닙니까. 따지다 보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한번 저질러보길 권하고 싶어요. 바둑이든 춤이든 주말농장이든 깊이 하다 보면 사회에 도움되는 일도 할 수 있어요. 가족과 같이 하면 더 좋고요.”

4년째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하며 그는 레스큐(구조) 자격증도 땄다. 동호인들과 구조대를 결성해 바다를 찾을 때마다 통발, 그물, 폐기물 등 오염물질을 건져올린다. 아내는 처음엔 “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그가 자꾸 빠져드니 불만이 있다. 그는 “무조건 빈다”고 말했다. 한달에 한번꼴이지만 바다에 나가기 전에는 “납작 엎드려” 잘해준단다.

1월6일 아침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매장. 매장 오픈(10시)을 앞두고 직원들이 두줄로 늘어서 강사의 율동에 따라 에어로빅을 추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매주 목요일 에어로빅 시간이다. 이들 중 유독 동작이 크고 유연해 보이는 남자가 눈에 띈다. 판매촉진팀 류승경(42) 팀장이다. 류 팀장은 “팀장이라서 열심히 하는 것일 뿐”이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누가 보더라도 적성에 맞아 보인다. 그는 “처음에는 민망했는데 자꾸 하다 보니 오히려 즐기게 됐다”면서 “오히려 간부급들이 더 열성”이라고 말했다.

중년기란 꿀꿀한 시기가 아니다

이미나 교수는 “중년 초입의 전환기를 통과하는 데는 대략 5년쯤 걸린다”면서 “지금까지 갖고 있던 생각이나 사회적 통념에서 해방돼 새로운 생각에 기웃거리고 새로운 집단에 가보고, 최후에 자신이 갖고 싶은 이미지를 그려볼 것”을 권했다. 중년기란 그저 늙어가는 꿀꿀한 시기인 것만은 아니다. 이 교수는 “통찰력과 지혜, 의사결정 능력, 경제적 여유도 있는 인생의 황금기”라고 말했다.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서 카리스마와 치사함, 욕망과 슬픔이 묘하게 어우러진 표정으로 ‘중년의 얼굴’을 재구성했던 김 선생(백윤식)의 표현에 따르자면, 중년기는 한마디로 “시추에이션이 좋은” 때이다. 유쾌하고 전복적인 취미를 갖는 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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