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위 60% 잘라낸 ‘바리케이드 화가’ 최병수씨… “몸이 용서해주면 다시 현장으로 돌아올 것”</font>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화가 최병수(44)씨가 암에 걸려 위를 60%나 잘라내는 수술을 하고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든 생각은 ‘그의 몸이 태클을 걸었구나’ 하는 거였다.
14살에 독립해 중국집 배달원, 선반공, 보일러공, 공사판 잡역부 등 온갖 밑바닥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인스턴트 음식을 피하고 세끼 밥을 챙겨먹어왔던 바른생활 소년이자, 20대 중반 이래 목수에서 걸개그림 작가로 환경·반전 현장미술가로 쉼없이 변신하는 동안에도 산과 갯벌에 주로 머물며 술·담배조차 안 했던 고집스런 무공해 청년의 몸이 경계경보를 보내온 건 지난해 3월이다. 그가 반전평화팀 일원으로 이라크를 찾았을 때다. 자장면 같은 진득한 피를 쏟았다. 굶으면 딱지가 굳겠지 싶어 그대로 현지 일정을 강행했다고 한다. 그가 바그다드에서 돌아나온 지 이틀 만에 미국의 대대적인 공습이 시작됐다.
그의 몸이 태클을 걸었구나!
이때부터 그의 호흡이 부쩍 가빠졌다. 폭격에 어린 손자를 잃은 할아버지가 아이를 안고 통곡하는 장면을 그린 , 지푸라기 대신 미사일로 만든 둥지에 지구 알을 담아놓은 , 김선일씨가 눈을 가린 채 결박당해 있는 모습을 새긴 등 대형 걸개그림을 계속 제작했다. 충격과 분노 속에 계속 ‘열받았고’ 그 열이 식기도 전에 ‘또 열받길’ 반복하는 동안 몸이 암덩어리를 키워오는 걸 살필 겨를이 없었다.
10월22일 서울 한남동 순천향병원에서 수술 뒤 입원치료를 받고 있는 그를 찾았더니, 병상 옆 스케치북 뭉치에서 몇 가지 작품들이 보였다. 갑자기 수술을 받게 돼 마무리하지 못했던 솟대 스케치라고 한다. 솔부엉이와 목련이 얹어져 있는 일산 고봉산살리기 솟대와 미사일 위에 삽이 얹어져 있는 평택 우리땅살리기 솟대 스케치였다.
“쓰러지면서도 ‘이거 죽을 병은 아니다’라는 확신이 뱃속 깊이에서 올라오더라고요. 주변에서 ‘이라크전 발발 뒤부터 부쩍 무리해서 그런 거니까, 부시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 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던데. 하하.”
아랫배부터 가슴까지 죽 그어진 수술자국이 보였다. 지난해 이라크에 다녀온 뒤부터 위궤양 약을 먹었는데 올 초부터 배가 차고 더부룩해지더니 9월 중순에 갑자기 폭포수 같은 피를 쏟았다고 한다. 그는 “다행히 수술은 잘됐지만, 앞으로 항암치료를 받을지 대체의학으로 몸을 다스릴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목소리와 동작에 기운이 빠져 있었으나, 습관은 평소 그대로였다. 팔을 휘휘 저었고 문제를 얘기할 땐 목소리가 커졌다.
세계에서 먼저 알아주는 작가로
그가 머리보다 몸이 먼저 감응하는 사람임을 실감한 것은 지난해 1월 베트남 푸엔성에서 열린 한-베 평화공원 준공식 때 팀이 평화 솟대를 세웠던 그와 함께 현지를 찾으면서다. 바람이 세게 불어 행사장 천막이며 무대가 흔들릴 때 ‘초청작가’였던 그가 안 보이기에 찾아봤더니, 아무도 모르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익숙한 솜씨로 묶고 조이고 풀고 있었다. 그가 화가, 정확히는 대한민국 첫 ‘관제화가’가 된 사연도 필요한 일에 몸이 먼저 움직이는 ‘노가다’ 기질 덕분이다.
청년목수 최병수는 1986년 어느 날 홍익대생들이 정릉 주택가에 벽화를 그릴 때 사다리를 설치해주러 갔다. 진달래가 만발한 그림을 보고 무심코 “어, 개나리는 왜 안 그려요?” 한마디 던졌다. 학생들이 “아저씨가 그려보실래요” 하더란다. 그렇게 붓을 잡게 된 그는 성북경찰서로 끌려가 치도곤을 당한다. 일명 ‘상생도 벽화 사건’이다.
형사: 직업은? 최: 목수요. 형사: 목수가 그림을 그리는 건 앞뒤가 안 맞으니 화가로 하자. 그림은 언제 누구에게 배웠냐. 최: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배웠소. 형사: 왜 남녀가 태극기를 짓밟고 있냐. 최: 음양의 이치에 따라 남녀가 춤추는 거요. 형사: 왜 공공시설에 그림을 그렸냐. 최: 회색이 보기 싫었소…. 이날 경찰조서에 그의 직업이 화가로 기재되면서 그는 졸지에 화가가 됐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현대 민중미술이 낳은 유력한 매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최병수라는 이름과 함께 소개된 ‘걸개그림’을 그가 개발하게 된 사연도 화가가 된 과정만큼이나 우연했다.
1987년 그는 이한열의 사고 소식을 버스에서 옆사람이 보던 신문을 통해 알게 됐다.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왠지 신문에 난 그 사진을 판화로 새겨 가슴에 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는 하룻밤을 꼬박 새워 손바닥만 한 판자에 이한열이 피 흘리며 쓰러지는 사진을 새겨넣는다. 다음날 그가 손수건에 이를 찍어 집회장에 나가자 너도나도 달라고 해 몇천개를 찍었다. 누군가 그것을 대형 그림으로 그릴 것을 제안했다. 목수로서 공간 개념에 밝았던 그는 먹줄을 퉁겨서 그리면 되겠다고 여기고 ‘겁없이’ 덤벼들었다. 80년대 민중미술이 낳은 빼어난 양식, 걸개그림이 탄생한 순간이다.
그 뒤 1992년 리우환경회의에서 지구를 일회용 취급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한 을 내놓고, 1997년 교토지구온난화회의에서 얼음조각 를 발표하면서, 그는 세계에서 먼저 알아주는 작가가 됐다. 각종 집회현장에 ‘출몰’하는 그에게 언제부턴가 ‘바리케이드 화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의 무기는 몸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정규학력의 전부인 그에게 간혹 ‘식자’들이 ‘무식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학력보다 더 세상에 도움되는 건 새만금과 북한산과 평화와 인간성을 지키고자 애쓰는 동안 손등과 발목과 팔뚝과 허벅지와 등짝에 새겨진 상처들이기 때문이다. 화가 임옥상이 그런 그를 보여주는 시 한편을 쓴 일이 있다.
“너는 머리보다 먼저 깨어 늘 머리를 지켜왔다. 머리가 생각만 하고 도무지 움직이려 하지 않을 때도 너는 몸을 던져 궂은일을 도맡아 왔다. 지금은 머리들만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손, 너를 기리고 찬양하는 날은 분명히 온다. 너도나도 머리를 찾아 아우성이지만 네가 계속 움직이는 한 세계는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다”(최병수에게 바치는 시 ‘손’)
흙집에 머물며 ‘깊이 반성할’생각
이런 그의 몸이 딱 제동을 걸었으니, 심정이 어떨까?
“‘성장한 야만’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오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라크전이 터지는 걸 보면서 대체 이 문명이 어디로 가고 있나 싶어 ‘문명의 외도’라는 작품 구상을 시작했어요. 다 컨베이어벨트에 올라 흘러가는데 앞길은 컴컴한, 그런 거. 정작 그러면서 내 몸이 과속하고 있는 걸 잊고 있었지요. 몸은 자연하고 같아요. 몇 차례 기회를 줘요. 경고를 해요. 그런데 그야말로 줄곧 ‘씹었으니’….”
수해 전 그가 무주 산골짜기에 내걸었던 “꿩먹고 알먹으면 멸종한다”는 구호가 생각났다. 최씨는 “계속 자연을 거스르며 질주하다가는 문명이든 사람이든 다 망한다는 걸 몸이 먼저 보여줬다”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당분간 경기 가평의 흙집에 머물면서 “깊이 반성할” 생각이란다. 몸이 용서해주면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현장에 돌아오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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