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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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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화] 무당님, 무당님, 우리 무당님!

등록 2004-10-07 00:00 수정 2020-05-03 04:23

서해안 풍어제 큰무당 ‘김금화’의 굿 전수관 건립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 여성들

▣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기쁨일까, 설움일까. 그는 울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서니 감사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합니다. 제가 세상을 너무 몰라 오랜 뜻을 이루는 것이 힘이 부칩니다. 모쪼록 여기 오신 분들은 강물이 풀리고 얼음이 녹듯이 소원이 이뤄지길 빕니다.”

내림굿 뒤 57년… 새마을운동 시절 고생

9월16일 저녁 7시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처음으로 한 무속인을 위한 후원의 밤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접신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춤과 노래로 그 응어리를 풀어주고 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사람. 큰무당 김금화(72)씨는 난생처음으로 이런 자리가 마련되자 세월의 갈피갈피마다 접혀 있던 온갖 회한과 감상이 피워오르는 듯 보였다. 심한 무병을 앓다 17살 외할머니로부터 내림굿을 받아 입무한 지 57년 만의 일이었다.

20년 넘게 김금화 선생과 교분을 쌓아온 소설가 이경자씨는 “예술이 뭔지, 여자가 뭔지 김금화를 통해 알게 됐다”는 말로 인사말의 운을 뗐다. “황해도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태어난 선생은 입 하나 덜기 위해 14살 나이에 시집을 갔습니다. 선생의 눈썹 위에는 당시 시어머니에게 주걱으로 맞은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지요. 무당이 된 뒤 천한 직업이라는 세상의 괄시 속에서도 선생은 꼿꼿하게 허리 펴고 제 길을 걸어왔습니다. 유럽·미국에선 선생의 기예가 훌륭한 전통문화로 대접받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낯가림이 심합니다. 이제 선생의 숙원사업인 강화도 문화전수관(금화당)이 꼭 건립돼 많은 사람들이 굿과 전통문화를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이어 서해안풍어제 연희 장면이 무대에 잠깐 올려졌다. 너른 마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어깨를 들썩이는 것에 비하자면 한참 맛이 떨어지는 딱딱한 무대였으나, 김금화씨는 춤과 노래로 복을 빌며 손님들에게 축수를 했다. 굿을 보인 뒤엔 20명이 넘는 제자들을 무대로 불러내 이름을 하나씩 호명해가며 소개를 했다. “무당이 국회에 다 와보고, 세상 참 좋아졌습니다. 자, 너희들도 그렇게 움츠리고 있지 말고 앞으로 나와 당당하게 이름을 말하라우.”

무당의 길에 들어선 건 본인의 뜻이 아니었으나, 그 길을 계속 달려올 수 있었던 건 무당이라는 자의식과 굳은 의지 없인 불가능했다. 내림굿을 받은 뒤 피땀 흘려 무당 수업을 받고 19살에 독립한 그는 굿이 좋다고 주위에 널리 알려져 파주·옹진·해주·연백 등으로 바쁘게 불려다니다 한국전쟁이 나자 남쪽으로 내려온다.

“다른 무당에게 길 가르쳐 주고파"

불행했던 결혼생활, 무당에 대한 천시를 헤쳐가며 살아온 그가 무엇보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때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 말이었다. 미신 타파·근대화를 외치며 정부가 굿을 일절 금지한 것이다. 파출소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는 건 다반사요, 경찰들이 어느 날 굿당에 들이쳐 제기들을 압수해가기도 했다. 눈물도 많이 흘리고 기도도 많이 했던 그 시기를 거치며 그는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는 무당이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학교라곤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기에 마흔이 넘어서야 한글을 깨친 그가 세상과의 접점을 찾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72년 김수근씨가 마련한 문화살롱 ‘공간사랑’에서 굿을 펼치며 그는 굿이 미신이 아니라 고유의 민속예술임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여주자고 다짐했다. 그의 노력은 이후 서서히 결실을 맺게 된다. 학자들은 굿의 연희적 성격을 주목했으며 ‘종합예술’로 대접하는 안목 있는 사람들도 늘어났고, 외국에서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985년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는 경사가 이어졌다. 김금화씨가 금화당을 마음속에 품은 건 해묵은 일이다. 외국을 돌아다니며 굿에 환호하는 많은 이들을 만나면서 “된장국·김치 먹고 절절 끓는 온돌에 자면서 굿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을 꼭 만들고 싶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원을 입 밖에 내자 처음엔 가족과 지인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이제 나이도 일흔인데 돈이라도 조금 손에 쥐고 있어야 안심이 될 뿐더러 혹시 이 일에 너무 마음을 쓰다가 건강까지 해치면 큰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씨의 뜻을 꺾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너희는 얘기들 하지 마라. 내가 다 알아서 할게”라며 칼을 빼드는 기세엔 누구도 이길 수 없었다. 있는 돈을 탈탈 털고 서울의 집을 저당 잡혀 강화도 하점면 신봉리 3650여평의 땅을 산 것이 2001년. 그러나 그 뜻을 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가뜩이나 돈이 모자란데 공사를 맡은 건축업자들도 성의를 다하지 않고 이런저런 핑계만 댔다. 화병이 나 입원까지 할 정도로 속을 끓인 김금화씨는 주위의 여자들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다.

“조상님 하던 전통굿의 뜻을 어루고 새기고 기려야 하는데 춤추고 점만 치는 걸로는 도저히 안 되겠소. 혹세무민하는 다른 무당들에게도 길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옛날부터 괄시받고 무시당하던 여자들이 속 끓이며 찾아온 것이 무당 아니었는가. 금화당 건립에 우리 여성들이 모이면 어떻겠소?”

방송인 오한숙희, 변호사 진선미, 국회의원 홍미영, 소설가 이경자 등이 팔을 걷어붙였다. ‘여성 인간문화재를 지키자’며 나선 것이다. 오한숙희씨는 사람을 모으고 조직하는 일을, 진선미씨는 공사와 관련된 법률 자문을, 홍미영 의원은 지원책을 찾고 동료 의원들에게 이 뜻을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이경자씨는 “혼자서 오랜 세월 선생을 흠모해왔는데 역시 이렇게 여성들이 힘을 뭉쳐 조직적으로 움직이니 뭔가 되는구나 싶다”며 기뻐했다.

개신교·가톨릭 신자까지 후원 나섰다

그 자신이 감리교 신자임에도 무속인 후원사업에 뛰어든 오한숙희씨는 “후원회에 뜻을 보탠 이들 중엔 개신교·가톨릭의 사제·목사도 여럿”이라고 말했다. 종교와 상관없이 그분의 문화적 가치를 제대로 대접해줘야 한다는 데 동감한 것이다. “옛날에 무당은 하늘과 인간을 맺어주는 제사장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치료사였잖아요. 물론 요즘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마음이 약해진 것을 틈타 큰돈을 요구하는 사기꾼 무당도 있지요. 하지만 지금은 고가구라고 해서 무지무지 비싼 값을 받고 있는 장롱·반닫이 같은 옛 가구를 생각해보세요. 20년 전까지만 해도 시골의 집집마다 가지고 있던 거 아녜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서양 문화가 좋다며 우리는 옛날 것들을 다 쓸어버린 겁니다. 김금화 선생이 무당이라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면 그건 우리가 그 귀한 뜻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금화당은 11월께 1차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기도를 올리는 삼신각과 2층 높이의 전통공연장이 문을 여는 것이다. 김금화씨는 앞으로의 소원을 마치 무가 부르듯 읊조렸다. “괴로운 사람, 힘든 사람, 병든 사람, 외국 사람, 한국 사람 모두 모여 마음을 달래고, 널리널리 이 뜻이 퍼져 온 나라가 평안~해지면 좋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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