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천연염색의 산업화 기틀 닦는 이상필 교수… 사람에게 이로운 식물색소의 아름다움 나누고파 </font>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자연의 빛깔에서 우러나는 오묘한 색상의 매력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치고 오디를 따먹다 옷소매에 묻힌 보라색물이나 자운영 풀밭에 드러누웠던 증표인 풀물, 황톳길을 걷다 바지에 물든 황톳물 등을 경험하지 않은 이는 드물 것이다. 자연의 소재에는 저마다의 색소들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소재에 깃들어 있는 색소를 활용하는 천연염색은 고대 미라의 마직물을 염색한 염료인 인디고처럼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화학염료가 개발되면서 차츰 일상에서 멀어져만 갔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자연의 빛깔이 서서히 일상의 아름다움으로 ‘복원’되는 추세에 있다.
장인 찾고 원예학 공부하는 실험정신
천연염색은 주로 식물에서 색소를 얻는다. 염색의 재료로 쓰이는 식물이 200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식물을 이용한 대표적인 색깔은 목초지에서 생활하던 인디언들이 풀물을 들인 데서 비롯됐다는 ‘인디고블루’(Indigo Blue)인데, 이는 쪽을 염료로 하여 얻는다. 치자·울금·강황으로는 노란색을, 소목·홍화로는 붉은색을, 자초·코치닐로는 보라색을, 숯·오배자·오리나무로는 검은색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코치닐은 선인장에 기생하는 벌레, 오배자는 붉나무에 기생하는 벌레집이다. 나무에 기생하는 버섯이나 바위나 돌에 생기는 암균도 염료로 쓰이며, 돌가루나 흙(황토)도 각광받고 있다.
이러한 천연염색이 예술적으로 거듭나면서 산업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동신대 이상필 교수(산업디자인학과·44)는 천연염색 전도사가 되려고 한다. 이 교수가 자연의 빛깔을 찾으려 염색 색소를 함유한 물질과 더불어 지낸 것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교수는 서양화를 전공하려고 들어간 대학에서 직조를 비롯해 염색과 제지(전통한지) 등에 관련된 분야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예 20대 후반부터는 천연염색 분야의 ‘장인’을 찾아다니며 비법을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이 교수는 전통을 복원하는 ‘전수자’가 되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천연염색의 대중화를 위한 색상의 표준화, 과학적 접근을 위한 천연염색 재료의 메커니즘쪽으로 관심 영역을 차츰 넓혔다.
자연물은 사람의 정성을 머금으며 신비로운 빛깔을 드러낸다. 이 교수가 쪽염색을 하는 과정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국내에서 재배되는 쪽은 요람으로 마디과에 속하는 1년생 식물이다. 여름에 수확한 쪽을 항아리에 담고 물을 부어 양지에서 1~2일가량 그대로 둔다. 그리고 쪽잎이 황색으로 바뀌었을 때 쪽을 건져내고 쪽물에 패각회를 넣고 고무래로 30분 동안 저으면 청색으로 변한다. 이렇게 채취한 쪽염료를 발효시켜 염색 재료로 이용한다. 물기가 있는 면천을 쪽물에 넣어 10여분 동안 1차 염색을 하고, 다음부터는 30분씩 면천을 쪽물에 넣어 원하는 색깔을 얻는다.
한약재 재료… 냄새 · 균 · 해충 막아
천연염색의 어떤 재료라 해도 함유된 색소는 한 종류가 아니다. 이러한 색소를 제대로 추출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같은 식물이라도 산지나 생육환경, 채취 시기 등에 따라 색소의 함량이 결정되기도 한다. 염료식물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을 위한 이 교수의 집념은 40대의 나이에 대학원에서 원예학을 공부하고 있는 데서도 느낄 수 있다. 이 교수는 직접 쪽과 홍화 등을 가꾸면서 염료와 직물에 전자빔을 쪼이고 물리적 충격을 주면서 견뢰도를 높이는 등 과학적인 천연염색 방법론을 세워나가고 있다. 게다가 학교 안에 천연염색 연구실을 두고 과학기술부 지역연구센터 등과 연계해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그동안 농산물 폐기물과 미활용 식물자원을 이용한 기능성 천연염색 제품을 개발하고, 솎은 배나 배잎, 탱자 추출물의 색소에 의한 직물염색 등을 연구해 산업화의 기초를 닦기도 했다. 개량한복 업체의 용역을 받아 천연염색 색상 표준화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천연염색의 쓰임새를 의류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활 소품으로 넓히는 데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미 기능성 비누를 비롯해 모발 염색제, 식용 색소 등도 개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전문적인 업체가 나선다면 조만간 시중에서 이러한 제품들을 접하게 될 것으로 그는 기대하고 있다.
최근 천연염색은 웰빙(Well-Being) 바람에 힘입어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천연염색이 인간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대부분 천연염색 재료들은 한약재로 쓰일 정도로 인체에 유익한 효과를 낸다. 실제로 천연염색으로 만든 의류에는 항균성과 소취성, 원적외선 방출 등으로 질병을 예방하고 해충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이 있다. 게다가 화학염료에 의한 오염을 크게 줄이는 친환경적 대안염색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또한 천연소재에서 얻은 색상들의 색감은 화학염료의 색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연스럽고 편안하며 볼수록 매력적인 절제미와 우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아직까지 천연염색 공예품들을 누구나 가까이하기는 힘들다. 천연염색 실크스카프 하나의 가격도 보통사람들이 쉽게 장만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편이다. 천연염료 자체의 가격이 높은 탓도 있지만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천연염색 재료를 얻거나 염색을 하는 데 일일이 사람이 개입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염색 공정을 표준화해 분업으로 해결한다면 가격을 크게 낮출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천연염료를 대량 생산하는 업체도 등장해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 접어들었다. 현재 천연염색 제품들은 다품종 소량 생산을 통해 수요층을 넓혀가고 있다.
국내의 천연염색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이상필 교수의 발걸음도 바빠지고 있다. 이 교수는 넥타이, 스카프, 발(커튼) 등의 제품을 개발해 해외 진출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밀라노와 상하이 등지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물론 국내에서도 수십여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최근에는 나비축제로 널리 알려진 함평군과 손잡고 천연염색 넥타이와 스카프 등의 관광기념품을 개발해 호평을 받았다. 이달 초에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국제 홈텍스타일 박람회’에 참가해 천연염색 원단과 천연염색 제품을 전시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남도지역 천연염색 제품이 세계 각국을 누빌 날이 멀지 않았다. 올 추석에 천연염색 제품으로 마음을 전해 입소문을 내는 것은 어떨까.
대량 생산 시작되고 국제 홍보 펴져간다
천연염색은 자연의 숨결을 간직한 색채의 마술을 보여주는 듯하다. 들풀이나 푸성귀조차도 이 교수를 거치면 멋을 내는 색으로 피어난다. 천연의 재료를 매만지며 햇빛과 바람 속에서 빛깔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꾀하다 보니 은근히 풍기는 맛이 예사롭지 않다. 어디에서도 낯설지 않은 자태를 뽐내며 어느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누구나 천연염색의 멋에 빠지면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교수는 천연염색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는다. “천연염색의 산업화를 위한 노력들이 아직 충분하지는 않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꾸준히 노력하고 있기에 소비자들의 관심 속에서 머지않아 괄목한 성장을 이룰 것이다. 천연염색을 미래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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