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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영] 청년운동의 살아 있는 역사!

등록 2004-08-20 00:00 수정 2020-05-03 04:23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그해 여름도 무더웠다. 1994년 여름, 최고 기온을 연일 경신하는 기록적인 폭염이 쏟아졌다. 그해 한반도의 하늘에는 유난히 많은 별이 떨어졌다. 1월에는 통일운동의 큰 별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떴고, 2월에는 노동과 대지를 노래했던 김남주 시인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8월12일 폭염 속에서 청년운동의 버팀목 이범영 의장이 타계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지난 8월12일 서울 용산의 백범기념관에서 ‘청년지도자 고 이범영 기념사업회’가 주최한 1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이날 추모식에 앞서 긴급조치 9호 시대를 학술적으로 조명하는 추모 토론회가 열렸다. 70년대 초반 학번인 이 의장의 대학 시절은 긴급조치 9호 시대와 겹쳐 있다. 유신독재와 맞서 싸우며 대학 시절이 흘러갔다. 그의 대학은 구속으로 마무리됐다. 졸업을 앞둔 1976년 12월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돼 옥살이를 했다.

그의 청년 시절은 운동으로 채워졌다. 83년 김근태, 장영달 의원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을 주도했다. 민청련 정책실을 책임지며 87년 6월항쟁을 이끌었다. 1992년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한청협) 초대 의장을 지냈고 1998년 민청련 의장이 됐다. 그는 민청련, 한청협으로 이어지는 80년대 청년운동의 살아 있는 역사였다. 민주화 이후에는 통일운동에 헌신하다 또다시 구속됐다. 독재정권과 분단 체제에 온몸으로 맞서 싸우던 이범영 의장은 94년 암투병 끝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지인들은 그를 ‘부드러운 카리스마’ ‘외유내강형 인물’로 기억한다. 후배인 이인영 열린우리당 의원은 “이론적으로 칼 같지만, 표현하는 방식은 항상 차분하고 조용했다”고 추억했다. 민청련 활동을 함께 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추모글에서 “늘 기대고 싶고, 그가 있어 든든했고, 푸근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김근태 장관으로 대표되는 ‘청년운동 1세대’와 80년대 학번이 주축을 이루는 ‘전대협 세대’를 잇는 ‘청년운동 2세대’의 대표 주자였다.

그의 동지들은 기성세대가 됐다. 어떤 이들은 금배지를 달았고, 다른 이들은 고위 공직자가 됐다. ‘청년지도자 고 이범영 기념사업회’의 면면은 화려하다. 기념사업회 회장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았고, 추모위원 명단에는 국회의원이 여럿 들어 있다. 민청련 후배인 유기홍씨, 전대협 세대인 이인영, 임종석씨 등이 금배지를 달았다. 그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영원한 청년으로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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