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 858기 사건 당시 안기부 수사관 5인 공식인터뷰… “김현희의 진술에만 의존한 게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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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국정원 수사관들의 첫 마디는 “억울하다”였다. KAL기 폭파 사건은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난 사건인데, 왜 터무니없는 의혹이 제기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충분히 예견된 반응이었다. 하지만 수사관들은 수사 결과를 무조건 믿어달라고 ‘강변’하지는 않았다. 자신들의 수사에 미흡한 점이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유족들의 의문을 충분히 풀어주지 못한 것에 미안해했다. 이런 태도는 ‘안하무인’으로 악명이 높았던 ‘중앙정보부’나 ‘국가안전기획부’의 이미지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수사관 중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요원은 “그 당시 수준으로는 완벽하게 잘 마무리된 수사였는데 지나고 보니 미흡한 점이 좀 있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지금 오해를 사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김현희 진술 확인할 방법 없었다”
그는 17년 전 ‘폭파범’ 김현희를 직접 바레인에서 압송해온 ‘선발대’로 뽑힐 만큼 유능한 수사관이었다. 그에게 이 수사는 평생 자부심을 느낄 만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심혈을 기울인 그의 작품은 지금 ‘수지 김 사건’과 같은 졸작으로 전락할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말들이 많았습니다. 워낙 엄청난 사건인데다, 주검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북한의 소행임을 입증하는 정황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 그렇게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수지 김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갑자기 시끄러워진 겁니다. 지난 2001년 우리 회사(국정원)가 수지 김 사건을 인정해주는 바람에 KAL기 사건도 조작 의혹이 제기된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조작이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는 공작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조작설이 계속 제기되는 현실을 수사관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수사에 미흡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죠. 김현희의 진술에만 의존한 게 한계였습니다. 그의 자백이 아무리 완벽하더라도 다시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한 겁니다. 하지만 그때는 김현희의 진술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김현희가 이동 경로로 택한 나라들은 당시 우리나라와 수교를 맺지 않고 있어서 직접 가서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목격자도 없고, 탐문이나 현장 검증도 불가능했죠.”
안기부의 KAL기 폭파 사건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87년 12월1일 바레인을 탈출하려던 김현희가 생포된 뒤 안기부는 김현희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안기부는 12월13일 여성 수사관을 포함한 2명의 수사관을 바레인에 급파했다. 이들의 임무는 김현희를 안전하게 국내로 압송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레인 당국이 순순히 신병을 인도해줄지 의문이었다. “바레인은 우리와 범죄인인도조약을 맺은 나라도 아니고, 게다가 김현희는 일본인(하치야 마유미) 여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원칙대로 한다면 일본으로 넘겨야죠. 그러나 바레인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순순히 우리에게 김현희를 넘겼습니다.”
김현희는 13대 대통령선거 하루 전인 12월15일 서울로 압송됐다. 다음날 치러진 대선에선 ‘6월항쟁’으로 분출된 뜨거운 민주화 열기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의 후계자인 노태우가 당선됐다. KAL기 폭파 사고가 뿌리 깊은 ‘안보 불안 심리’를 자극한 탓이었다. 이 때문에 김현희 압송 시점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하지만 수사관들은 이런 지적에 고개를 저었다. “김현희 압송은 안기부가 결정한 게 아닙니다. 김현희 신병 인도는 외교부가 주도해서 바레인 당국과 협상한 겁니다. 아마도 이 사건의 피해자가 가장 많기 때문에 우리 쪽으로 김현희를 넘긴 게 아닌가 추측할 뿐이죠.”
사진 · 이동경로 · 폭탄 성분 등 오류 많아
안기부는 한달 동안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인 뒤 88년 1월15일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단순 비행기 추락 사고 조사가 6개월 이상 걸리는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수사였다. 급히 서두른 탓인지 여기저기 허점이 드러났다. 수사 결과 발표 뒤 곧바로 여러 곳에서 공격을 받았다. 공격이 집중된 곳은 안기부가 제시한 김현희의 어릴 적 사진이었다. 사진 속 김현희의 귀가 실제 김현희의 그것과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안기부는 지난 2001년 공식적으로 사진이 잘못됐음을 인정했다. 오류의 원인은 김현희가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잘못 지적했다는 것이다.
안기부는 지난 3월 KAL 대책위의 질의서 답변에서 “김현희는 72년 평양 순안공항에서 열린 남북조절위 남쪽 대표단 환영식 때의 사진으로 알고 자신의 모습을 지적했는데, 그 사진은 남쪽 대표단을 환송할 때 찍은 사진이었다. 환송식 때는 김현희가 도열해 있는 순서가 환영식 때와 달라서 착오를 일으켰다. 수사 당시 환영식 때 사진은 확보하지 못했는데, 일본의 사진기자가 찍은 환영식 사진을 2001년에 입수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수사관들은 2001년 이전에 이미 김현희의 사진이 잘못됐음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오류를 확인했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현희를 직접 조사한 한 수사관은 “사진 문제가 제기됐을 때 즉시 잘못된 것을 확인했지만, 의혹을 부풀릴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진 문제는 이 사건의 큰 줄기가 아니라 곁가지다. 사진 오류가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북한 공작원 김현희와 김승일이 KAL기를 폭파했다는 실체적 진실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건 정말 우리도 모를 일이다”
수사관들이 수사의 오류를 확인한 것은 사진 문제뿐만이 아니다. 김현희의 아버지 김원석의 신분과 김현희 일행의 동유럽 이동 경로에 관한 김현희의 진술이 앞뒤가 맞지 않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수사관들은 인터폴 등에 김현희의 행적을 파악해줄 것을 의뢰했는데, 그 결과 김현희의 진술과 몇 가지 다른 부분이 있음을 알아냈다. 하지만 인터폴 회신이 수사 결과가 발표된 지 한참 뒤에 나오는 바람에 오류를 바로잡을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수사관들은 김현희가 몇 가지 사실에 대해 착각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김현희가 북한에서 공작원 교육을 받으면서 외웠다는 각종 맹세문은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이 외우면서, 자신이 내렸던 기차역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한 수사관은 이런 지적에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북한 체제는 암기에 능숙하도록 만든다. 어릴 때부터 맹세문 같은 것을 암기하도록 교육받기 때문에 웬만한 글은 쉽게 기억해낸다. 하지만 여행 때 들렀던 장소는 잠시 착각할 수 있다. 기자는 지난 여름휴가 때 묵은 숙소의 방 번호를 정확하게 기억해낼 수 있는가.”
김현희는 일제 파나소닉 라디오에 장착된 시한폭탄 작동시간을 헷갈리게 증언해서 수사관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김현희는 안기부 수사 때 시한폭탄 작동시간을 11월28일 23시05분(바그다드 시각)이라고 진술했으나, 사면 복권 뒤 발간한 수기에서는 이보다 25분이나 이른 22시40분이라고 밝혔다. 이 대목도 이 사건의 조작 의혹을 일으키는 중요한 근거로 제시된다. 한 수사관은 “KAL 858기의 최종 교신 시간을 분석하면 수기에 적힌 시간이 틀리다는 결론이 나온다. 김현희가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모르겠다. (김현희가) 일부러 안기부를 골탕먹이려고 그랬는지 한때 의심하기도 했다”며 “안기부가 그 수기를 미리 감수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김현희가 착오를 일으킨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수사관들이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한 사실도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게 김현희가 사용한 폭발물의 성분이다. 김현희는 수사 때 폭발물 성분에 대해 모른다고 진술했다. 안기부는 당시 폭약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은 뒤 폭약 성분이 ‘C(콤포지션)-4’라고 밝혔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한 수사관은 “김현희는 폭약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폭약 성분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보니 조그만 분량으로도 그만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C-4라는 것이다. 이는 미 연방항공관리국이 88년 7월 모의실험을 한 결과 가능성이 입증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 결과 김현희의 옷과 김승일(체포 당시 자살)의 복대에서는 엉뚱하게도 TNT 성분이 검출됐다. “그건 정말 우리도 모를 일이다. 원래 옷과 복대를 만들 때 TNT 성분이 들어가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조작의혹, 먼저 근거 제시해야
안기부 수사가 무엇에 쫓기듯 서둘러 진행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수사 방식이 매우 서투른 대목도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수사관들도 수사가 서둘러 진행됐다는 지적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상부의 압력이나 정치적 의도가 작용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한 수사관은 “KAL기 폭파는 전세계적 이목이 집중된 사건이었다. 당시 한국은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었는데, 항공기 테러에 대한 국제 사회의 불안감을 빨리 해소하지 못하면 올림픽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하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수사관들은 이 사건의 조작 의혹은 단호하게 부인한다. “만약 조작됐다면, 정권이 바뀌는 동안 그 흔한 ‘양심선언’이라도 한번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조작 의혹을 제기하려면 먼저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안기부 수사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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