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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무슨 책을 읽을까

등록 2004-08-06 00:00 수정 2020-05-03 04:23

정책이나 정치사상·업무 혁신·리더십에 관한 책 등 세 가지가 주요 관심분야

▣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출판계는 여름과 겨울을 독서의 계절로 꼽는다. 가을? 가을에는 사람들이 놀러다니기 바쁜 탓인지 책이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여름에 “더운데 나다니지 말고…”라며 책을 읽는다는 게 요즘 출판계의 분석이다.

기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독서 경향을 취재했다. 신흥 독서의 계절인 여름인데다, 최근 한나라당이 노 대통령한테 “사상을 밝히라”고 나오는 바람에 대통령의 ‘생각’에도 관심이 높아진 탓이다. 독서 경향에는 그 사람의 생각이 묻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대통령의 ‘독서 내역’이 기밀로 취급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 당국자는 “대통령이 누구를 만나 어떤 보고를 받는지, 어떤 보고서를 접하는지를 일일이 밝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휴가지에 들고 가는 책이라며 ‘여러 측면을 고려해’ ‘세심하게 골라서’ 몇권씩 발표하는 정도만이 예외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대통령이 읽는 책이 수시로 공개되면 “왜 그런 책을 읽느냐” 또는 “왜 다른 책들은 읽지 않느냐”라는 논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은 탄핵 기간에 ‘일과 소개’ 차원에서 대통령이 소장파 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저작을 읽는 동영상을 촬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진보 성향 책만 읽는다”는 시비가 붙을까봐 대외 공개를 유보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이 지난해 문화방송의 독서 프로그램 에서 소설가 김훈의 를 청소년 권장도서로 추천한 일도 뜻밖의 후폭풍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이 “뭐라고 표현할 수 없다. 굉장하다. 어른들에게도 권한다”고 말하자, 그 책이 10여만부 이상 더 팔려나가는 ‘대박’을 낳은 것이다. 해당 출판사는 좋았겠지만 다른 출판사들은 볼이 부어오를 상황이었다. 그만큼 ‘대통령의 독서’가 민감한 관리대상이라는 이야기다.

어쨌든 윤태영 청와대 제1부속실장은 기자의 물음에 “대통령의 독서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편”이라는 전제 위에서 △정책이나 정치사상 △업무 혁신 △리더십에 관한 책 등 세 가지가 주요 관심분야임을 전했다.

‘정책이나 정치사상’ 분야에서 최근 공개된 책은 를 꼽을 수 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이데올로그로 꼽히는 앤서니 기든스가 썼으며, 노동의 미래라기보다는 ‘신노동당의 미래’를 담은 국가경영 전략서 성격의 책이다. 노 대통령은 총선 뒤 청와대 만찬에 참석한 열린우리당 17대 총선 당선자들에게 이 책을 한권씩 들려보내며 ‘일독’을 권했다.

앤서니 기든스가 영국의 구좌파 노동당 노선의 개혁을 뼈대로 하는 ‘제3의 길’ 주창자임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토니 블레어 집권 2기의 전략을 요약한 이 책에서도 “구좌파는 사회 정의에 강했지만, 역동적이고 경쟁적인 경제를 길러내는 데 성공적이지 못했다. 대처주의는 경쟁력에서는 강했지만, 사회적 정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신노동당은 직면한 어려운 손익계산을 인정하면서 이 두 가지를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노 대통령의 1년여 국정 행보는 앤서니 기든스이 주창한 ‘제3의 길’과 흡사한 측면이 적지 않다. 대기업 노조의 이기주의를 비판하거나 재계의 투자 의욕을 북돋우려는 의식적인 노력 따위가 그것이며, 법과 질서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종종 표현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앤서니 기든스는 또 이 책에서 “좋은 사회란 국가가 지배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사회다. 좋은 사회는 국가, 경제, 시민사회 혹은 시민문화라는 3개의 주된 사회제도가 균형 상태에 있는 사회이다. 국가가 지나치게 강력해질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에서 매우 잘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노 대통령은 집권 이후 탈권위주의, 자율과 분권의 철학 등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 역시 “국가가 모든 영역에 개입해 이끌고 나가는 시대는 지났다”는 발상에 따른 것이었다.

노 대통령의 386 참모의 일원으로 청와대 의전비서관을 지낸 서갑원 의원(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이 집권하기 오래전부터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관련 서적을 많이 읽은 편”이라며 “우리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사상으로 본 것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 자신도 2월28일 과의 인터뷰에서 “토니 블레어 이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실용주의 노선과 제3의 길이 일반화됐다”며 관심사의 일단을 드러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상가’로서의 면모가 있다고 흔히 말하는 것과 달리, 노 대통령에게 비슷한 평을 하는 사람은 적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아직 사상적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진 못했을지라도, 체계적인 사상 정립 또는 사상적 완결성을 추구하는 면모는 그에게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정책과 정치사상에 관한 책을 대통령이 되기 이전과 이후에 꾸준히 읽는 데서 그런 점이 엿보인다.

‘업무 혁신’ 분야에선 노 대통령은 (지니 다니엘 덕 지음)와 (존 코터·댄 코헨 지음) 등의 책이 읽을 만하다며 주변에 권해왔다. 노 대통령은 올 1월3일 국정토론회에서 가 “변화의 관리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느낌을 주는 책”이라고 평했다. 에 대해서는 “이 책을 읽으면서 (변화하려면) 정말 기술이 필요하구나 하는 점을 느꼈다”고 말했다.

경영기법 · 업무혁신 등에 관심

노 대통령의 경영기법·업무혁신 등에 대한 관심은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인 전기정씨를 대선 후보가 되기 이전부터 참모의 일원으로 참여시켰던 데서도 잘 드러난다. 전씨는 청와대 업무혁신비서관으로도 일했으며, 지금은 강태영씨가 후임 비서관을 하고 있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이광재 의원(열린우리당)은 “대통령은 잭 웰치 제너럴일렉트릭 회장의 책들을 자주, 꼼꼼히 읽어왔다”고 말했다.

리더십 분야로는 이순신, 링컨, 드골, 마가릿 대처 등의 전기를 대통령이 읽어왔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노 대통령은 4월11일에는 ‘드골의 리더십과 지도자론’과 관련해 “오로지 외로운 해방운동 끝에 파리에 입성하면서 정통성 있는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승인받을 수 있었던 지위에서 드골의 고집이 빛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꼭꼭 씹어 읽는 스타일

노무현 대통령은 책을 읽되 재미로 한 차례 읽지 않고 씹고 또 씹어 곰삭이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청와대 소식지인 은 이를 두고 “노 대통령은 재미가 있거나, 완전한 이해를 원하는 책은 여러 번 되풀이해 읽는다”며 “(유년기 이야기이긴 하지만) 역사에 한창 흥미를 붙였을 때는 학원사에서 나온 를 7번이나 읽었다”고 소개한 적도 있다.
노 대통령이 ‘완전한 숙지’를 추구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는 공직자들과의 연찬회 따위에서 “학습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는 조직은 미래가 없다”며 독서를 권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즉, 그는 독서는 곧 ‘학습’이며, 학습은 건성으로가 아니라 숙지될 때까지 해야 효과가 있다고 믿는 것으로 볼 만한 대목이다.
노 대통령은 또 자신의 ‘독서 결과’를 주변에 이야기하는 것도 즐기는 편이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 기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최근 책에서 읽은 듯한 새로운 개념을 10여분씩 죽 설명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면서 자신의 머리에 정리한 개념의 오류 가능성 따위를 확인하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서갑원 의원은 “대통령은 이런 과정을 통해 개념과 논리의 체계성과 완결성을 채워나가려 한 것 같다”며 “논리의 체계가 딱 서지 않고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못 견뎌하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이런 면에서 노 대통령의 독서에는 ‘지적 근본주의’가 깔린 듯도 하다.
자신이 읽거나 연구 중인 개념을 그때그때 이야기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어리둥절할 때도 종종 생긴다. 노 대통령은 “좌우 이념 대결의 시대에서 거버넌스(governance) 경쟁의 시대로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공개석상에서 말한 적도 있다. 노 대통령 자신이 “거버넌스를 마땅히 번역할 말이 없어 지배구조라고도 하는데…”라고 주석을 붙이기도 했지만, 역시 일반 국민들로서는 좀처럼 알아먹기 어려운 용어였던 셈이다.
노 대통령은 독서를 좋아하기 때문에, 독서를 계기로 필자와 인연을 맺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이며 지난해 감사원장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던 윤성식 교수(고려대)는, 노 대통령이 그의 을 읽고 “만나보고 싶다”고 하면서 참모가 된 경우라고 한다. 드골의 리더십을 쓴 외교관 이주흠씨는 청와대로 불러 리더십 담당 비서관을 맡겼다. 를 번역한 신광영 교수(중앙대)를 불러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모색 및 방향 제시’를 발제하도록 하고 1시간여 함께 토론한 적도 있다.
노 대통령이 읽을 책은 △본인이 사오라고 하는 것 △수석·보좌관 등 참모들이 권하는 경우 등으로 나뉜다. 국정상황실은 아예 전담 직원을 두고 ‘대통령이 읽을 만한 책’을 늘 조사해 추천하는 업무를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노 대통령도 취임 초기에 밀려드는 국정 현안에 쫓겨 한동안 독서를 잘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재계 총수들과의 회동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으로부터 “나는 비서실 직원들에게 책을 요약해서 제출하라고 하기 때문에 하루에 2권씩 책을 읽는 셈”이라는 말을 듣고, 노 대통령도 그 방법을 함께 쓰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요즘 노 대통령의 평균 독서량은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 이에 서갑원 의원은 “대통령이 바둑을 비롯해 잡기를 즐기지 않는 터에 저녁에 관저에서 독서 외에 다른 할 일이 있겠느냐”며 “1주일에 한두권은 소화할 것으로 추측한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좀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윤태영 청와대 제1부속실장은 “읽어야 할 보고서들이 많은 탓에 생각보다 독서할 시간은 많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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