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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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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 “아이들과 평화를 약속한 걸요”

등록 2004-05-20 00:00 수정 2020-05-03 04:23

병역거부 선언한 초등학교 교사 최진씨… 문경 산골에서 일군 ‘조화로운 삶’을 지키고파

문경=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그는 소탐대실하는 사람이다. 아예 소탐대실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큰 돈, 큰 집, 큰 명예…. 사람들이 큰 목표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불만이다. 자신은 큰 목적을 위해서 ‘작은 즐거움’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날마다 즐겁게 일하고, 재미있게 놀기를 원한다. 그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열심히 하고 살다보면 좋은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옳다고 생각해서 병역거부를 하게 됐고, 좋은 일을 좇다보니 교사 직위를 잃을 위기에 놓였다.

협박 · 욕설에서 느낀 타인들의 상처

경북 문경의 시골 초등학교 교사인 최진(27)씨가 스승의 날이자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인 5월15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했다. 교사로서, 공무원으로서 처음이다. 최씨는 “나에게 병역거부는 아이들과 노는 일과 다르지 않다”며 “아이들의 마음에 숨어든 폭력의 씨앗을 없애는 일을 하듯 병역거부를 통해 사회에 뿌리내린 폭력의 씨앗을 없애려 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병역거부는 비폭력 직접행동의 한 방법일 뿐이다.

“저의 병역거부는 군대만을, 전쟁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의 폭력과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우리의 소중한 일상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진정으로 더불어 사는, 하느님이 처음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회복의 실천이 ‘비폭력 직접행동’입니다. 저는 비폭력 직접행동으로서 군대거부를 선언합니다.”(최진씨의 병역거부 소견서 중에서)

최진씨는 전교생이 42명인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인근의 산골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 흙집을 짓고 농사를 일구는 공동체다. 그의 병역거부는 아이들을 섬기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병역거부는 조화로운 일상에 파장을 몰고 왔다.

그를 찾아간 5월13일 오후, 학교로 낯선 남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북파공작원이라고 했다. 동료교사들은 점심 때부터 계속 전화가 왔다고 전했다. 최진씨가 전화를 받았다.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통화를 마친 최진씨는 “처음에는 학교를 폭파해버리겠다고 위협하더니 나중에는 콩밥 먹을 테니 잘 다녀오라며 끊었다”고 전했다. 최진씨는 그 사람도 군사주의의 피해자로 생각했다. 오히려 그의 목소리에서 폭력의 상처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의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인터넷 카페(cafe.daum.net/naagaljin)에 욕설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에 당당함이 없으니까 욕부터 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군대와 전쟁은 그것에 찬성하는 사람에게조차 상처를 남긴다”고 씁쓸해했다. 그래도 고립무원의 시골에서 물리적 폭력이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는 사람도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답했다.

석달마을의 참상에 ‘전쟁’ 다시 공부

오히려 그는 병역거부를 통해 민감한 더듬이를 선물받았다고 했다. 병역거부자라는 이해받지 못하는 약자의 위치에 서게 되니까 다른 약자들의 상처에 더욱 민감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아이들과의 관계에 더욱 민감해졌다. 그는 “나는 어른으로서, 교사로서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상대적 강자”라며 “약자의 입장이 되니까 아이들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고, 상처가 더욱 또렷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중학교 때부터 도보여행을 즐겨왔다. 길을 걸으면서 별을 보고, 나무와 풀을 벗 삼아왔다. 교대 졸업을 앞두고도 홀로 국토순례 도보여행을 떠났다. 통일전망대에서 완도로 내려갔다가 다시 부산에서 강원도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구룡령을 넘고 있을 때였다. 인적 하나 없는 산길을 걸으면서 마침내 자신을 만났다. 눈을 감자 상처받은 나, 숨기고 싶은 나가 보였다. 나의 욕심 때문에 나를 미워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을 차리자 얼어붙은 눈물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즈음 문경의 공동체를 만났다. 그는 공동체의 식구들과 함께 성경도 읽고, 금강경도 외우고, 코란도 듣고, 인디언 말씀도 묵상했다. 그 모든 것이 ‘영성’ 안에서 하나다. 그의 평화 심성은 그렇게 깊어갔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보면서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됐다. 2002년 겨울, 그는 문경의 석달마을을 방문하게 됐다. 석달마을은 한국전쟁 때 주민 127명 중 86명이 학살당한 곳이다. 공비토벌을 하러 온 국군이 주민들이 국방군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양민을 학살한 것이다. 학살당한 양민 86명 중에는 13살 미만의 아이들이 27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더욱 충격이었다. 그는 “막연하게 알고 있던 군대에 대해, 전쟁의 역사에 대해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의 반 아이들과 함께 고민한 끝에 문경 시내에서 이라크 전쟁반대 1인 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손에는 아이들이 만들어준 피켓이 들려 있었다. 시골 동네에서 1인 시위는 아주 낯선 풍경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래도 20일 넘게 1인 시위를 계속했다. 그는 “처음에는 부끄럽고 어색했지만, 나중에는 온전히 기도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고 돌이켰다. 아이들과 함께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고 기도를 드렸지만, 결국 한국군 파병이 결정됐다. 그와 아이들은 망연자실했다. 그는 “아이들 앞에서 가눌 수 없는 부끄러움과 분노가 솟아올랐다”고 말했다.

“떠나야 하지만 미안해하진 않겠어”

마침내 5월18일자 입영 영장이 날아들었다. 그는 ‘거짓 없이 정직하게 살자고 나누었던 아이들과의 약속을 이제는 지킬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심을 지킨 대가로 아이들 곁을 떠나야 한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자격증이나 국가의 인정이 교사를 교사이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 학부모, 다른 교사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존중함으로써 교사가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폭력으로부터 생명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에서 교육은 시작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미안하지만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신념을 지키지 못하면 더 이상 교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뿐 아니라 모든 ‘여린’ 생명들이 그의 편이라고 느낀다. 그는 숲길을 걷다 “풀도, 나무도, 벌레도 생명을 지키려는 나의 ‘동지’들”이라며 웃었다.



피스 몹 “병사를 집으로!”


“하나 둘 셋 넷!”
5월15일 오후 2시, 서울 대학로에서 군복과 교복을 입은 사람들이 구령에 맞춰 국민체조를 하고 있었다. 체조가 끝나자 사람들은 군복과 교복을 벗어던졌다. 국민체조 대신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군복을 벗어던진 사람들은 ‘제멋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5월15일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아 벌어진 ‘피스 몹’(Peace Mob)의 풍경이다. 병역거부 연대회의 최정민 공동집행위원장은 “규율에 길들여진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고 각자의 자유를 되찾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피스 몹이 끝나자 서너명의 군인이 지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나동혁씨 등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다. 하얀 페이스페인팅을 한 이들은 전쟁에 지친 군인을 상징한다. 이들의 등에는 ‘병사는 집에 가고 싶다’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나씨는 “부도덕한 이라크 전쟁은 중단돼야 하고, 한국군을 파병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5월15일은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이다.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은 1981년 세계병역거부자회의에 의해 시작됐다. 95년 이후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에 의해 세계 각국에서 조직되고 있다. 해마다 군사주의가 극심하고, 병역거부자에 대한 탄압이 심한 나라를 정해 그 나라의 현실을 각국에서 알리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올해는 칠레 등 라틴아메리카의 병역거부자들에 초점을 둔 행사가 칠레, 영국, 미국 등에서 열렸다. 한국에서도 병역거부 연대회의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행사를 열었다. 한국 행사의 슬로건은 ‘병사를 집으로!’. 이라크 파병 반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날 행사는 파병 반대, 병역거부권 인정 촉구, 라틴아메리카의 군사주의 반대를 내용으로 치러졌다.
강문규에서 황진성까지, 이날 행사장에는 ‘가나다’ 순으로 정리된 520여명의 이름이 내걸렸다. 2003년 말 현재 수감돼 있는 한국의 병역거부자들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병역거부자가 수감돼 있는 나라다. 한국 정부는 올해 유엔 인권위에서 통과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결의안에 서명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날 대구에서는 초등학교 교사 최진씨가 기자회견을 열어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세계 최대 병역거부자 양산 국가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이 또 한번 경신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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