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보내달라 외치는 전향장기수들… 끔찍한 고문과 감시, 수치심의 나날들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다큐멘터리 영화 에는 북송을 앞둔 비전향 장기수들을 위한 환송회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인 비전향 장기수들이 연단에 앉아 함박웃음을 짓는 사이, 카메라는 연단 아래서 이들을 바라보는 전향 장기수 김영식(70)씨에게 잠시 멈춘다. 부러움과 슬픔이 묘하게 뒤섞인 김씨의 표정에는 부끄러움이 어려 있었다. 30여년을 함께 감옥에서 보냈고 한때 동지였지만, 어떤 이는 떠났고 어떤 이는 남았다. 이들의 인생을 갈라놓은 것은 우습게도 ‘사상전향서’라는 종이조각이다. 사람들은 이 종이쪽지를 쓴 사람들을 ‘전향 장기수’라고 부른다.
‘떡봉이’를 들어보셨나요
남쪽에 연고가 없는 장기수들의 보금자리인 서울 봉천동 ‘만남의 집’에는 전향 장기수 3명이 함께 살고 있다. 마당에는 목련과 진달래가 보기 좋게 어우러졌고, 작은 텃밭에는 상추와 배추 모종이 가지런히 심어져 있다. 한때 많게는 10여명이 함께 살았지만, 지난 2000년 모두 북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사람 좋은 웃음의 김영식씨와 말수 적은 문상봉(79)씨, 그리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귀가 어두운 정순택(83)씨가 새로운 식구가 되었다. 근처에 사는 박종린(71)씨도 가끔 찾아와 말벗이 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지난 2000년 장기수 북송대상에서 제외됐다. 정부는 ‘전향 여부’를 송환 기준으로 삼았고, 1970년대 국가의 살인적인 전향공작 앞에서 전향서를 쓴 이들은 정부의 기준에 따라 ‘자연스럽게’ 대상에서 제외됐다. 당시 “강압에 의한 전향은 무효”라며 공개적인 전향취소 선언을 한 뒤 북송을 원했던 정순택씨와 정순덕씨가 돌아가지 못한 것도 이 종이조각 탓이었다. 결국 ‘마지막 빨치산’으로 알려진 정순덕씨는 이달 초 긴 투병생활 끝에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사상전향제도는 애초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을 천황의 사상으로 ‘개조’하기 위해 일제가 도입한 제도다. 박정희는 1973년 중앙정보부의 지휘와 책임 아래 ‘사상전향공작반’을 설치해, 조직적인 강제전향 작업에 나섰다. 이때는 1953∼55년에 구속돼 무기징역을 살던 좌익수의 상당수가 1960년 4·19 혁명 이후 20년형으로 감형을 받고 출소를 앞둔 시점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살인·강도 등 죄를 지은 흉악범들에게 ‘떡봉이’라는 완장을 주고 “전향시키면 풀어준다”며 꼬드겨 장기수들을 고문하게 했다. 많은 장기수들이 이 과정에서 숨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죽음’과 ‘전향’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전향’을 선택했지만, 이들 강제전향 장기수는 결코 ‘전향’이라는 단어를 먼저 말하지 않는다. 입에 올리는 것조차 수치스러워하는 이들에게 전향은 수십여년을 따라다니는 ‘치욕의 그림자’다.
인터뷰 내내 코끝이 빨갛던 김영식씨는 장기수들 사이에서 ‘지옥’으로 통했던 광주교도소에서 물고문에 못 이겨 전향서를 썼다. “고문틀에 밧줄로 묶어놓고 손은 수갑을 채워요. 그리고 목 뒤에는 나무 막대기를 대서 꼼짝도 못하게 하는 거야. 그러고 나서 천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천천히 물을 붓는 거지. 에후, 도저히 못 견디겠어. 어떤 분은 잘 견디기도 하는 모양이더만. 그것도 고개를 살짝살짝 돌리는 요령이 있는 모양이야. 그런 걸 알았어야지….
전향의 ‘전’자만 나와도…
당시 자신을 고문했던 이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는 김씨는 “‘교무과장 만날래, 안 만날래’ 하면서 물을 들이붓는데 꼭 죽을 것 같았다”며 “전향서를 어떻게 썼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이북, 빨갱이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하며 말끝을 흐렸다.
“빈총도 안 맞은 것만 못하다고… 나는 낙인이 찍혔으니깐 대화를 할 때도 꿀리지. 원래 여기 만남의 집에 (북에서 함께 온) 일행이 2명 있어서 계속 오라고 했는데, 내가 부끄럽고 꺼림칙해서 안 갔어.” 출소 뒤 막노동과 배농사, 비닐공장 등 안 해본 일 없이 살았던 김씨는 일행이 모두 북으로 송환된 뒤에야 전주에서의 생활을 접고 서울로 올라왔다.
지난 1960년 동료 6명과 함께 남파됐다가 그대로 검거된 문상봉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87년 출소할 때까지 28년을 고스란히 감옥에서 보냈다. 수감 초기부터 “몽둥이로 때리고 밧줄로 후려치는” ‘일상적인’ 전향공작에 시달렸지만 전향서를 쓸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문씨는 교도소의 망루 아래로 끌려갔다. 망루 아래 컴컴한 창고에 들어선 문씨는 두명에게서 1시간이 넘도록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맞은 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방으로 돌아갔다. 며칠 뒤 또다시 망루 아래로 끌려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창고에서 문씨는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두명에게 또다시 몇 시간을 두들겨맞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던 문씨는 결국 “알았습니다”라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 뒤 다시 1년여를 버티다 교무과장 앞에서 “민주주의가 좋습니다”라는 전향서를 썼다.
이들은 비전향 장기수들과의 만남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내면에는 갈등구조가 없었지만, 전향 장기수들의 삶에는 ‘드라마’가 있었다. 양심을 포기했다는 수치심과 종이 한장에 인생이 갈려버린 안타까움, 현실에 대한 분노는 천형처럼 수십년 동안 전향 장기수들을 따라다니며 옥죄었다. 문씨는 한동안 전향의 ‘전’자만 나와도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고 김영식씨가 귀띔했다. “마음이 괴롭지. 내가 내 양심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지금도 상당히 괴로워요. 괴로워서 말하기가 싫어. 수치스럽고 화가 나.”
“우리를 최후까지 인질로 잡는다”
1959년 정치공작원으로 남파돼 35년을 감옥에서 보낸 박종린씨는 지난 2000년에 있었던 송환장면을 차마 지켜보지 못했다. 감옥에 함께 있었던 동지들이 떠난다는 말에 서울로 올라와 인사를 나눴지만, “가슴이 너무 아파서” 송환 전날인 9월1일 서울을 떠났다. “당시에 조금만 일찍 알았어도 (북송)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던 박씨는, 이후 2차 송환에 관련된 정보를 조금이라도 빨리 얻기 위해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2차 송환에 대한 남북 정부의 대응은 소극적이고 더디기만 하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은 6·15 남북공동선언의 합의사항이지만, 남쪽 정부는 전향서를 쓴 이들은 기본적으로 국내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며 북송을 거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회장은 “강제전향은 전향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사상전향제도와 준법서약서가 사상·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등의 위헌성 때문에 이미 폐지된 상황에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잔혹한 고문으로 강제전향시킨 것은 원천적인 무효라는 설명이다.
게다가 정부는 ‘보안관찰’을 통해 전향 장기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 2년에 1번씩 갱신되는 보안관찰 때문에 이들에게 ‘자유’는 없다. “어디 갈 때는 꼭 신고해야 하고, 누구를 만났는지, 뭘 했는지도 담당 경찰에게 알려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자유도 없는 셈이에요.” 박종린씨는 “정부는 전향서를 썼다며 북으로 보내지 않지만, 내용적으로는 우리를 비전향자로 취급하고 있다”며 “남쪽 정부가 우리를 최후까지 인질로 잡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이 북쪽이라는 것을 잊은 적이 없었다. 박씨는 “예전에는 여기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라는 권유를 주위에서 많이 받았다”며 “가족들도 다 북에 있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면 매우 불쾌하고 화가 났다”고 털어놨다. 세월이 지날수록 고향땅과 고향에 있는 처자식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간절해진다. 금강산이 자리한 강원도 고성군이 고향인 김영식씨는 먼 발치에서라도 고향을 보고 싶은 마음에 지난 2002년과 2003년 금강산 관광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속초에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33명 가운데 28명만 남아
이들은 “전향 장기수는 북이 환영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부의 우려에 대해서는 “북에서 떳떳하게 평가받겠다”고 말한다. 강제전향 등 개인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는데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제대로 평가받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문상봉씨는 “나이가 많아 언제 저 세상으로 갈지 모르겠습니다. 이왕이면 살아 있을 때 북쪽으로 보내주세요”라며 호소했다.
지난 2001년 2차 송환을 주장하고 나선 33명 가운데 이제 28명만이 남았다. 이들 대부분이 70살 이상의 고령이고, 오랜 구금기간과 고문에 따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또 대부분 남쪽에 연고가 없어서 독거노인에게 나오는 정부보조금 20여만원이 이들 수입의 전부다. 30여년의 감옥생활과 ‘강제전향’이라는 주홍글씨까지 가슴에 새긴 이들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오늘도 만남의 집에서는 망향가가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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