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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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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공 주술사 “약발이 끝내줘요”

등록 2004-02-06 00:00 수정 2020-05-03 04:23

사상 감정의 ‘딱지’ 남발하는 공안문제연구소… 법원·검찰의 책임 회피 속에 이념의 칼자루 휘둘러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여기 한 연구소가 있다. 전화번호는 114에도 안 나온다. 연구소장의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비밀조직’이다. 직제나 구성은 물론 모든 일은 비공개로 진행되고 연구원들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하지만 이 연구소의 감정을 거친 자료에는 대개 ‘좌경’ ‘용공’ ‘친북용공 성향’ ‘반정부적’이라는 섬뜩한 딱지가 붙여져 나온다.

경찰대학 산하의 공안문제연구소는 ‘사상 감정소’이다. 지난 1988년 10월, “공안관련 정책방향 및 좌경세력의 실태와 이념적 성향을 연구·분석하고, 대응이론을 개발”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사실 서울 남영동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있던 내외정책연구소가 공안문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공안문제연구소는 남영동 대공분실이 홍제동으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가 분실 건물 1·2층을 함께 사용하는 등 공안당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고, 현재는 경기도 용인시 경찰대학 본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인이 하루에 2건씩 자의적 잣대 행사

공안문제연구소의 운영규칙은 △국내외 좌익세력의 실상과 전술 등의 실태 및 문제점 도출 △공안 관련 정책방향 제시와 대안 개발 및 자문 △공안사건에 관한 문건 감정 및 분석 등을 연구소의 업무로 정하고 있다. 하지만 공안 관련 문건 감정 및 분석이 전체 업무의 60%를 차지한다. 연구소의 ‘고객’은 국가정보원과 국군기무사, 대검찰청, 경찰 등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경찰청 차장을 지낸 전아무개 치안감이 2000년부터 현재까지 소장을 맡고 있으며, 12명의 연구관과 기능직 직원 등 모두 22명이 연구소에서 일한다. 12명의 연구관 가운데 오아무개(50)씨 등 5명은 ‘원년멤버’이며, 유아무개(46)씨 등 4명은 1996년에 나란히 들어왔다. 대부분이 연구소에서 잔뼈가 굵은 셈이다.

인건비를 제외하고 1년 예산은 5천여만원에 불과할 정도로 비교적 작은 연구소지만, 이곳에서 감정하는 문건의 수는 규모와 비교할 때 ‘비현실적’이다. 1994년 3886건이던 감정 건수는 1998년에는 6540건까지 늘었고, 1999년의 감정 건수는 그 해 8월까지 7557건이다. 1999년 당시 연구원 수가 14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연구원 1명당 감정 건수는 539.8건에 이르는 수치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해도 매일 2.2건 이상의 ‘이적성’ 여부를 감정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연구’는 접어두고, ‘감정’에만 매달리는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불철주야’ 감정에 매달려 내놓는 ‘좌익’과 ‘용공성’ ‘반정부적’이라는 공안문제연구소의 감정결과는 매우 모호하고 자의적이다. 좌익이나 용공성, 반정부적이라는 의미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며, 이를 판단하는 기준도 명확히 정해져 있는 것이 없다.

2002년 이적단체로 기소된 한국청년단체협의회(한청) 사건에서, 공안문제연구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을 통해 획기적인 민족대단결의 사회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전 민족적인 환영 분위기를 조성하는 사업을 각계각층과 연대해 힘 있게 조직한다”는 한청의 표현물에 대해 “김정일 답방 환영위원회 구성 등의 사업계획은 김정일 답방활동을 찬양하고 있으므로 ‘용공 성향’으로 판단된다”는 감정을 내렸다. 이 논리대로라면, 6·15 공동선언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을 요구했던 정부 역시 용공 성향을 보인 것이 된다. 그러나 당시 검찰은 공안문제연구소의 감정결과에 따라 이 문건을 이적표현물로 기소했고, 법원 역시 유죄 판결을 내렸다.

단어 하나로도 친북 · 용공 올가미에

‘다함께’라는 학생조직이 전쟁 반대에 대한 목소리를 높인 것도 공안문제연구소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가지 못했다. 공안문제연구소는 “미국은 이번 탄저병 테러의 핵심 용의자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지목하고 있다. …한 과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과 러시아만이 무기생산용 분말 탄저균을 보유하고 있다”고 표현한 ‘다함께’ 문건에 대해 “미국을 비방하는 내용으로, 이념적 측면에서 주장은 없으나, 반정부적 성향의 표현물로 판단된다”고 밝힌 것이다. 미국 비판이 ‘반정부’로 분류된 것이다.

‘친북·용공 성향’이라는 규정도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연구소쪽은 한총련 이적규정 철회를 주장한 부분은 “북한의 대남선동 노선과 일치한다”며 친북 용공성이 있다고 분류했고,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 주장은 “북한의 상투적인 대남선동 주장과 일치한다”고 감정했다.

최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수감 중인 송두율 교수의 저서에 대한 공안문제연구소의 감정결과도 그동안의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995년 송 교수가 펴낸 에 대해 공안문제연구소는 “북한에서 강연했으며 김(일성) 사망에 조문까지 했던 재독 교수로서 북한의 주장과 선전을 그대로 사실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용공성이 있는 문건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과 선전을 그대로 사실로 묘사’했다는 근거는 뚜렷하지 않다. 심지어 송 교수가 저서 에서 국가보안법과 준법서약서를 비판한 부분을 ‘반미·반정부적 투쟁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들의 논리구조는 간단하다. 현실사회에 비판적인 의견을 제기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선전·선동’이고,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남북화해에 대한 기대는 ‘용공’이다.

한상희 건국대 법대 교수는 “공안문제연구소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는 전혀 인정하지 않고, 글 전체의 맥락과 상관없이 ‘사회 안정에 위험요소’라는 이유로 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왜 위험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근거를 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위험한 점은 이러한 주관적인 감정결과가 별다른 여과장치 없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의 근거로 활용된다는 것이다. 이 연구소에서 내놓은 ‘용공성’ 또는 ‘좌익성’이 있다는 감정결과가 대부분 국가보안법 혐의의 ‘유력한’ 증거로 채택돼, 공안당국의 기소 내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공안당국은 “공안문제연구소의 감정결과는 참고자료에 불과하고, 이를 활용하는 것은 주임검사 개인의 판단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공안문제연구소는 이미 1994년 경상대학교의 교양교재인 를 이적 문건으로 감정하고, 검찰이 이를 근거로 기소하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념 칼날 거두고 ‘세상’ 밖으로…

최근에도 건국대 김용찬·김종곤씨 사건과 아주대 ‘자주대오’ 사건, 진보의련 사건 등 주요 공안사건에는 ‘좌익’ ‘용공’ 딱지가 붙은 공안문제연구소의 감정서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또한 법원의 판결에도 이 연구소의 감정서는 ‘확정된 사실’로 인정돼 유죄 판단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송소연 민주화실천운동가족협의회 총무는 “보안법 사건의 경우, 경찰의 수사기록과 검찰 공소장, 법원 판결문의 내용이 차이가 거의 없어 ‘붕어빵 재판’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며 “여태껏 경찰이 첨부한 공안문제연구소의 감정서가 검찰이 기소 단계에서 ‘폐기처분’된 경우는 거의 없을 뿐더러, 다른 전문가들의 의견이 채택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고 꼬집었다.

공안문제연구소쪽은 자신들은 순수 이념 연구소일 뿐이고, 채택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검찰과 법원의 몫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10여년 동안 어둠 속에서 휘두르던 칼날을 거두고 ‘세상’으로 나오지 못할 이유도 없다. ‘부싯돌도 부딪혀야 빛이 난다’는 볼테르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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