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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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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는 이효리, 길게는 엄정화

등록 2008-08-01 00:00 수정 2020-05-03 04:25

2주 차 두고 앨범 낸 댄싱퀸들의 격돌… 의 리듬이 여름을 휩쓸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는 풍경을 거의 볼 수 없듯, 팬층이 비슷한 덩치 큰 가수끼리는 같은 시기를 피해 활동하는 게 가요계의 오랜 관례였다. 자칫 서로의 ‘파이’가 줄어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슈가 분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타 작곡가와 프로듀서의 풀이 한정된 탓에 같은 작곡가의 다른 노래가 같은 시기에 깔리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다.

‘아티스트’ 엄정화의 또 다른 야망

그런데 붙었다. 그것도 이효리와 엄정화다. 물론, 작심하고 진검승부를 펼친 건 아니다. 2주 정도라는 밭은 시간차가 둘의 컴백 타이밍으로 잡힌 데는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우선, 올림픽이다. 월드컵과 올림픽 기간은 전통적으로 문화 시장의 비수기다. 8월 동안 국민의 관심은 당연히 온통 베이징으로 쏠릴 것이다. 대박을 노리고 앨범을 내봤자 ‘쪽박 찰’ 확률이 높다. 게다가 8월 초에는 서태지가 컴백하겠다고 진작 선전포고를 한 상태다. 그리고 둘 다 댄스음악으로 승부를 내는 가수. 그렇다면 대기가 한창 달아오를 때 치고 올라오는 게 시기적으로 유리하다. 8월이 오기 전의 여름을 놓칠 수 없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경쟁이라는 프레임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효리나 엄정화나 이번 앨범이 갖고 있는 의미는 클 수밖에 없다. 우선 엄정화. 1990년대의 ‘섹시퀸’ ‘댄싱퀸’이었던 그는 정말 한국의 마돈나가 되고 싶었던 듯하다. 마돈나가 90년대 후반 당대의 일렉트로니카 뮤지션과 작업하며 엔터테이너에서 아티스트로 격상했듯, 엄정화는 과 등 지난 두 장의 앨범에서 달파란, 정재형, 지누 등의 실력파 일렉트로니카 뮤지션들과 함께했다. 결과는? 비평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평론가들은 기꺼이 두 장의 앨범에 손을 들어줬다. 는 2007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일렉트로니카·댄스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엄정화에게 아티스트 못지않게 중요한 건 엔터테이너의 위치였다. 섹시퀸이자 댄싱퀸의 자리를 지키는 거였다. 그 누구도 뺏어갈 수 없었던 여왕의 권좌를 2003년 이효리가 가져갔을 때 내심 복잡한 심경이 아니었을까. 세월만 탓하기에는 그의 야심이 건재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번 앨범은 다시 대중의 열광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절대적 미션을 부여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효리도 마찬가지다. 돌이켜보건대 와 이 가수로서 이효리에게는 천장이었다. 2집 의 는 등장과 동시에 표절 논란에 시달려야 했다. 단순 논란으로 끝난 게 아니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까지 갔다. 핑클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던 DSP와 결별하고 가요계의 ‘미다스’로 통하는 김광수의 엠넷미디어와 계약을 맺은 뒤 미니 앨범을 발표했다. 여기에 담겨 있던 미디엄 템포 발라드 는 ‘왜 이효리가 씨야 짓을 하고 있냐’는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연기자로 영역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시청률 참패로 돌아왔다. 남은 건 ‘여자 유재석’이란 찬사를 받을 만큼 탁월했던 방송 진행능력. 만약 가수로서 존재감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이효리의 길은 MC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다. 그게 어디냐고? 천하의 이효리가 MC로만 굳어지기에는 뭔가 아쉽지 않은가? 본인에게나 업계에나.

이효리, 다중적 캐릭터를 하나로 모으다

엄정화와 이효리의 컴백 작품에 절치부심이 묻어나오는 건 그래서 당연지사다. 다시 엄정화. 그가 손잡은 파트너는 YG다. 빅뱅을 대성공시키며 아이돌 시장에 파란을 일으킨 YG의 가장 큰 자산은 확실한 대중적 코드에 SM이나 엠넷미디어와는 차별화한 프로듀싱 능력이다. 엄정화는 그 능력을 샀다. YG의 힙합적 성격에 끌려만 가지도 않았다. 원타임의 테디가 작곡한 는 YG 특유의 감칠맛 나는 사운드 메이킹은 살리되, 엄정화가 그동안 추구해온 일렉트로니카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노래다. 절창의 보컬리스트는 아니되 탁월한 표현력을 가진 엄정화의 보컬도 최근 그 어느 앨범보다 잘 살아 있다. 여기에 빅뱅의 탑이 랩 피처링을 맡음으로써 엄정화를 잘 모르는 세대의 시선까지 붙잡는 데 성공했다. 여느 걸그룹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아니 혼자서도 그 이상의 존재감을 펼치는 뮤직비디오 역시 큰 관심을 끌었다. 지난 두 장의 앨범에 비하면 확실히, 엄정화는 다시 옛 영광을 되찾을 가능성이 높다.

이효리의 컴백도 성공적으로 보인다. 순차적으로 새 앨범 화보와 뮤직비디오 티저를 공개하며 서서히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온 3집 앨범 는 예전에 비해 분명히 나은 보컬 실력과 음악적 다양성을 보여준다. 타이틀곡 을 비롯해 대부분의 노래에서 목소리를 기계로 매만진 흔적이 많이 사라졌다. 영미권 여성 뮤지션들의 최신 트렌드인 복고풍 솔의 채취도 느껴진다. 같은 자전적 노래들을 통해 가수 이효리와 방송인 이효리로 나뉘었던 다중적 캐릭터를 하나로 모으는 데도 성공했다. 전자가 섹시함, 후자가 털털함을 대표하는 캐릭터였다면 이번 앨범에서는 두 명의 이효리가 만나고 있는 것이다. 뮤직비디오 표절 논란도 적극적으로 대처해 큰 문제없이 극복했다.

10년 뒤에 이효리는 어디에 서 있을까

시작은 양쪽 다 성공적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시장에서는 이효리가 압도적 우세를 점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등장과 동시에 모든 온라인 음원 차트에서 1위를 석권한 반면, 는 1위를 놓친 차트가 많았다. 엠넷미디어의 전방위적 마케팅에 상대적으로 의 열기가 주춤한 측면도 있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이효리의 승리로 올여름이 굳어질 조짐이다. 그러나 어차피 이효리와 엄정화는 같은 듯 다른 필드에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이효리가 철저히 방송과 젊은 층 중심이라면, 엄정화는 90년대를 관통했던 이들에게는 아직 누나이자 언니다. 그래서 장기적 시선이 필요하다.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섹시퀸, 댄싱퀸으로 부르는 게 어색하지 않은 여성 연예인은 대한민국에 엄정화 하나다. 약 10년이 지났을 때 이효리는 어떤 위치에 서 있을 것인가. 훗날 가요계는 둘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 하나의 전환점이 바로 올여름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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