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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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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사… 체리 따봉을 드립니다!

‘개나 주는 사과’에 상처받은 사과군, 사과맨의 도움으로 단어 바꾸기 테러가 벌어지는데…
등록 2022-09-06 08:07 수정 2022-09-09 22:58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 이야기는 청과민국에서 있었던 일로, 특정 국가의 현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내 이름 바꿔줘.” 과일 초등학교 6학년 사과군이 엄마에게 떼를 썼다. “애들이 자꾸 놀린단 말이야. 저번 체육 시간에 몸이 안 좋아 쉬는데 돌배 패거리가 이러는 거야. ‘너, 얼굴이 노오란 게 완전 인도 사과구나.’ 마침 선생님이 보고선 억지로 사과를 시켰어. 그런데 방과후에 이것들이 나를 슈퍼 앞 강아지한테 확 밀더라고. ‘사과는 개나 줘!’ 이러면서.”

“그런 애들은 상대를 마.” 씩씩대는 아들을 달래며 엄마가 말했다.

“가만있어도 집적거려. 오늘은 식당에서 소금을 뿌렸다고.”

“그건 왜?”

“나한테 ‘심심한 사과’를 전하고 싶은데, 너무 심심하면 안 되니 간을 맞춘대.”

처음엔 무시하던 엄마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 그 이름 바꾸자. 양육비도 안 주는 네 아버지가 지은 이름, 갖다버리자고.”

엉덩이에 王 자 부적

사과군은 엄마를 따라 대나무가 무성한 저택으로 들어갔다. 대문에는 ‘사주, 역학, 작명의 대가- 건공 법사’라고 적혀 있었다. 비싼 옷을 입은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법사에 대해 말했는데 아무튼 대단한 사람 같았다. 이 나라 최고 실세들을 좌지우지해 취업이며 건축허가며 규제완화며 뭐든 다 들어준다는 거였다. 반나절을 기다린 끝에 법당으로 들어갔더니, 하얀 도포에 긴 머리와 흰 수염을 드리운 법사가 앉아 있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복이란 놈이 도망가고, 운이란 놈이 달아나고, 횡액 재액 달려드니, 네 팔자가 요상하네.”

건공은 이상한 주문을 외운 뒤 사과군의 사정을 들었다.

“그래, 성명학적으로 보니 네놈의 팔자가 이름에서 비틀어졌구나. 사씨, 사씨, 사사사, 어떤 이름이 좋을까? 네놈 이마가 반들반들하니 ‘사기’ 어떠냐?”

“에엥? 사기치다의 사기요? 그럼 또 놀릴 건데요?”

“이놈아, 사기는 당하는 놈이 바보지. 세상의 법망만 잘 피하면 그보다 훌륭한 기술이 없어. 그리고 너희 게임할 때 ‘사기캐’ 이런 말 쓰잖아. 그거 엄청 칭찬이잖아.”

사과군이 싫다고 하자 건공은 다른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사채, 사칭, 사욕, 사탄, 사가지, 사이비, 사바하…. 사과군은 진저리를 쳤고 엄마도 제발 평범한 이름은 안 되겠냐고 사정했다.

“안 되겠다. 이름 대신 부적을 써주마. 그거면 아무리 힘센 놈들도 단번에 물리칠 수 있지.” 건공은 먹을 갈며 말했다. “자, 엉덩이를 까.”

“네, 엉덩이는 왜요?”

“몰라? 내 부적은 엉덩이에 王 자를 크게 쓰는 거야.” 건공은 먹과 붓을 준비한 뒤 뾰족한 침을 꺼내 촛불에 달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엉덩침을 놓는 거지.”

사과군이 울면서 버둥대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비서가 나타났다.

“유지킴(Yiji Kim) 여사님이 오셨습니다.”

번들거리는 명품 원피스에 고가의 보석을 주렁주렁 단 여자가 들어왔다. 법사가 벌떡 일어나 환대하자 유지킴은 유명 베이커리의 봉투를 옆에 놓고 앉았다.

“법사님, 요즘 법력이 떨어지셨나봐. 이번에 집 공사를 하는데 동쪽 전기가 좋다고 했잖아. 우리 인테리어 업자가 변압기에서 끌어다 썼는데 한전에서 찾아왔더라고. 전기 무단 사용이라며 우리를 거지발싸개 취급하는 거 있지? 내가 돈이 없어서 그랬겠어? 그리고 위약금 다 줬는데, 뭘 또 해명을 하라고….”

사과군이 옆에서 바지를 주섬주섬 추켜올리는데 유지킴이 사정이 궁금했나보다. 엄마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꼬마야, 내가 또 개명해서 팔자가 확 피었잖아. ‘개명을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라는 논문도 썼고. 그런데 번역하는 애가 잘못해서 ‘개명’을 ‘Dog Name’이라고 해서… 아무튼.”

유지킴은 개명 서류의 핵심인 소명자료를 꾸며내는 법을 알려줬다.

사과 엄마가 말했다. “그런데 얘가 법적으론 아버지가 있어서 그쪽 위임장을 받을 수 있을지?”

“서류는 적당히 만들면 돼요. 공무원들 게으르잖아요. 그리고 문제 생길 것 같으면 아는 검사한테 전화 한 통 해요.”

모과… 인삼 구기자 망고… 땡감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사과군이 아는 검사는 숙제 검사밖에 없었다. 엄마는 개명을 포기하라고 했고 절망한 사과군은 PC방으로 갔다. 인터넷에 ‘고통 없이 다시 태어나는 법’을 검색하는데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카톡이 왔다.

“고통 없이 다시 태어나고 싶어? 지금 학교 옥상으로 와.”

“누구세요? 제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우린 모든 걸 알고 있어. 지금 바로 와. 도망가면 안 돼.”

사과군은 덜덜 떨며 옥상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물탱크 쪽으로 돌아가니 ‘야옹!’ 하며 고양이가 튀어나왔다. 깜짝 놀라 뒷걸음쳤는데 아뿔싸, 발이 미끄러져 몸이 기우뚱했다. 옥상 난간을 잡으려는데 뿌지직 무너지고, 까마득한 저 아래로 떨어지려는 찰나. 누군가 그를 꽉 잡아 옥상 바닥에 내려놓았다. 검은 모자, 마스크, 선글라스. 가슴엔 초록색 사과 마크를 단 사람이 내려다봤다.

“뭐 하는 거야? 너 여기서 떨어지면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왜요?” 사과군은 자기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이상한 이름으로 놀림받는 것보단 그게 나아요.”

사과맨은 쯧쯧 혀를 찼다. “이거 봐, 대한민국 출생률이 OECD 꼴찌야. 여기 태어나려고 줄 선 천사들이 백종원 맛집 오픈런 저리 가라야. 네 순서는 언제 올지 몰라.”

“그럼 어떻게 해요?”

“‘사과’라는 말을 함부로 못 쓰게 해야지.”

사과맨은 해커 조직 ‘클랜 애플’의 리더. 엉터리 사과, 사죄, 반성으로 세상을 기만하는 세력을 응징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과하는 사람의 뇌파를 측정해 진정성 없는 말을 하면 그가 사과라는 단어를 쓸 수 없게 만들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하, 얼마 전 배달 치킨에 담배꽁초가 나온 사건 알아? 고객이 항의해도 발뺌하다가, 본사에서 호통치자 어쩔 수 없이 조금 전 SNS에 사과문을 올렸거든.”

불편함을 느끼신 모든 분께 모과(사과)드립니다. 고객분도 저희에게 인삼 구기자 망고(인상 구기지 말고) 말씀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땡감(유감)이네요.

사과군은 눈앞에서 단어들이 바뀌는 걸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거짓 사과문 아래엔 비난 댓글이 몰려들었다.

‘지성’하게 되었습니다

사과맨은 사과군을 차에 태워 교도소 앞으로 갔다. 기자들이 잔뜩 모여 있고 양복 입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환영하고 있었다.

“구여권의 대권주자였다가 비서를 성폭행한 죄로 수감됐던 사람이야.”

문제의 정치인이 나오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피해자에게 사과하실 계획은 없으십니까?”

“거기 대해 할 말은 없고요. 저를 끝까지 믿고 지지해주신 동지 여러분께 멜론의 말씀을….”

“네, 메롱이라고요?

“아니 그게, 진심으로 머스크멜론입니다.”

사과맨은 당황해하는 정치인을 뒤로하고 다시 차를 몰았다. 거짓 사과를 하는 사람이 넘쳐나 눈코 뜰 새가 없다고 했다. 서울 강남의 어느 아파트 앞에 기자들이 모여 있고, 어떤 여자가 창백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제 남편이 연찬회에서 여성 의원들의 외모를 거론한 것은 정말 잘못한 일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그러곤 뒤에 있던 남편을 억지로 끌고 왔다.

“저는 작가로서 ‘표현의 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깁니다. 험험. 그렇지만 제 발언으로 마음 상한 분들이 있다니 이유 여하를 떠나 지성하게 됐습니다.”

“뭐라고요. 죄송이요?”

“지, 지성이요.”

“그건 작가님 성함 아닙니까?”

기자들을 피해 아파트로 돌아가려는 작가 부부의 앞을 주민들이 막아섰다.

“우리한테는 왜 사과 안 하는 거요? 불법공사로 소음에 진동에, 애들이 공부를 못한다고.”

경찰대장실 초대 경찰서장의 과거

학교로 돌아와 사과맨과 헤어진 사과군은 신이 나서 엄마에게 전화했다. “이제 사람들이 사과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을 거야. 내 이름으로 놀리지도 못할 거고.”

엄마는 그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야 지금 거기 어디니? 너 뭘 하고 다니는 거야?”

행안부 경찰대장실. 얼마 전 논란 속에 임명된 초대 경찰서장이 무릎을 꿇은 사과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름을 바꾸려 했다고? 흠, 나도 가명을 가졌던 적이 있었지. 대학 때 운동권에 있다가 군대에 가서 모진 심문을 받았단다. 그러곤 마음을 돌려먹고 불순분자들을 고발했지. 빨갱이 노동조직을 일망타진시키고 이런 자리까지 오르게 된 거야. 그러니 너도 해커 조직에 대해 다 털어놓는 게 좋아.”

“저한테 밀정 짓을 하라고요?”

“이기는 편에 서라는 거야.”

“대장님이 일러바친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뭐, 감옥에 가고 고문당하고 인생 망치고 그랬지. 너도 그런 꼴 안 당하려면.”

“그 사람들한테 안 미안해요?”

“뭐라고? 미안? 그건 약한 놈들이나 쓰는 말이야. 패배자의 말이지.”

“이기고 지는 게 뭐가 중요해요? 왜 잘못한 걸 안 했다고 해요? 사과 안 하고 반성 안 하면 고칠 수가 없잖아요.”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

경찰대장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턱을 쭈욱 내밀더니 사과군의 머리꼭지를 꽉 잡았다.

대통령실 앞 야외 공원엔 ‘추석맞이 대국민 담화’라는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내빈과 기자들을 위한 좌석 주변은 삼엄한 경비 병력이 둘러쌌고, 특별 촬영 허가를 받은 극우 유튜버들만 자유롭게 다니며 카메라를 돌리고 있었다. 사과군은 경찰대장의 차량에 앉아 있었는데, 정부요원이 오자 경찰대장이 밖으로 나갔다.

“이번 담화는 정말 중요합니다. 떨어진 지지율을 회복하려고 VIP가 그렇게나 싫어하고 못하는 ‘사과’를 하기로 했다고요. 우리는 이 일을 위해 전설의 ‘사과 아티스트’도 데려왔습니다.”

“저도 압니다. 법조계의 전설이죠. 형량을 무조건 절반으로 깎는다는 반성문, 배심원단은 물론 강철 같은 판사의 마음까지 녹이는 반성의 최후진술을 작성하고 연기시키는 사람. 요즘은 기업체의 반성 SNS를 맡아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다던데?”

“그래요. 그가 만든 각본으로 VIP가 완벽히 연기할 겁니다. 그런데 해커 조직이 또 이상한 짓을 벌이면….”

“여부가 있겠습니까? 담화 전에 꼭 조직을 일망타진할 겁니다. 그걸 위해 좋은 미끼를 준비해뒀습니다.”

눈감고 사과 하나 받아준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첫 등교를 하는 날. 사과군은 학교 앞 편의점 옆에서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는 할아버지 옆에 섰다.

“아직도 추석 직전 대국민 담화 사건의 여파가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 배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해커 조직을 잡으려고 어떤 꼬마를 미끼로 썼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경찰을 배신하고 해커들에게 오히려 길을 터줬죠. 그러자 해커들은 대국민 담화 중에 단어 바꾸기 테러에 성공했고요. 신문이나 방송은 그때의 상황을 일절 보도하지 않지만 저희가 특별히 그 영상을 입수했습니다. 그럼 보실까요?”

연단에 VIP가 올라왔다. 완벽하게 준비한 연기로 담화문을 읽었다.

“그동안 국민의 고충을 헤아리지 못하고 공약을 이행하지 못한 것에 사… 사… 체리 따봉을 드립니다! 아,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따따봉 오렌지를… 심히 땡감, 낑깡….”

사과군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교문에 들어서는데 돌배 패거리가 다가왔다.

“너 괜찮아? 경찰에 잡혀가고 그랬다며?”

“풀려났어. 누군가 뒤를 봐줘서.”

해커 조직이 사과군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굉장하다. 그런데 우리가 할 말이 있어.”

“뭔데?”

“우리가 그동안 너 놀리고 그랬잖아.”

뭐지? 사과라도 하려는 걸까? 사과군의 주머니엔 해커 조직이 준 기계가 있었다. 성능이 강화돼 가짜 사과를 하면 혀에 전기가 통하는.

“그, 그러니까… 우리가 그동안 정말 미, 미, 미안했어. 사과할게.”

“뭐라고 했어?”

“사과! 아, 너 놀리는 거 아니야.”

사과군은 사실 기계를 켜지 않았다. 딱 한 번만 믿어주기로 했다.

“그래, 그 사과 받아줄게.”

이명석 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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