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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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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가방에 슬며시 친구 사무실에 슬쩍

전남 여수에서 인쇄소를 운영하는 박길만씨의 <한겨레21> 구독 나눔
등록 2019-09-18 07:02 수정 2020-05-03 04:29
취재 후원과 더불어 <한겨레21>을 보고 싶지만 구독이 어려운 이들에게 구독을 후원하는 ‘구독 나눔’을 진행하고 있다.

취재 후원과 더불어 <한겨레21>을 보고 싶지만 구독이 어려운 이들에게 구독을 후원하는 ‘구독 나눔’을 진행하고 있다.

전남 여수의 한 인쇄소 사무실. 9월2일 낮 12시50분께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놓인 네모난 탁자 유리 밑에는 (이하 ) 제1210호 표지 ‘평화여 어서 오라!’ 사진과 제1231호 표지가 깔려 있었습니다. 경기도 파주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로 마주 보며 군사분계선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던 모습(제1210호)과, 두 정상이 백두산 장군봉에 올라 두 손을 맞잡은 채 두 팔을 번쩍 든 모습(제1231호)이었습니다. 이 평화의 염원을 담아 앞과 뒤로 나뉘었던 표지를 하나로 ‘통일’한 표지들이었습니다. 손님이 가장 많이 앉는 자리 바로 앞에 인쇄소에서 직접 찍은 인쇄물도 아닌 표지들을 깔아둔 주인공은 바로 구독 나눔 후원 독자 박길만(64)씨였습니다.

그는 한사코 자기 얼굴을 찍는 대신 탁자 유리 밑에 깔아둔 표지를 찍으라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의 앞뒷면 연결 표지는 남북통일에 대한 독자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는 것 같아, 잡지를 받자마자 인쇄소 손님이 가장 잘 볼 수 있게 탁자 유리 밑에 넣어뒀어요. 다들 함께 을 봤으면 하는 마음이었죠.”

갸름한 얼굴에 짙은 쌍꺼풀이 진 박씨는 또래 남성보다 젊어 보였습니다. “을 보면서 항상 아이디어를 얻어”서 남들보다 젊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창간 때부터 구독한 장수 독자였습니다. 그의 잡지 사랑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월간 를 구독한 그는 이후 월간 을 보다 신문과 을 창간 때부터 구독했습니다. 여전히 그는 밤이 되면 을 읽다가 잠이 듭니다. ‘만리재에서’ ‘설렁썰렁’ 등을 순서대로 보고 긴 호흡의 기사로 넘어갑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후원제 도입 전부터 구독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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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난 3월 ‘후원제’를 도입하기 전에도 박씨는 나름대로 구독 나눔을 실천해왔습니다. 집은 물론이고 은퇴하기 전까지 공동 운영했던 전남 구례군의 한 납골당 내 사무실과 찻집에서도 을 추가 구독했습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직원 7∼8명이 을 돌려가며 읽을 수 있게 해마다 구독료를 대신 냈습니다. 납골당에 온 손님이 볼 수 있게 찻집에도 을 두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볼 수 있도록 일부러 추가 구독했어요. 제 나름대로 구독 나눔을 했어요.”

이 6월28일 후원 페이지를 개편하면서 ‘취재 후원’과 ‘구독 나눔’으로 방식을 구분하기 전부터 박씨가 ‘구독 나눔’ 취지로 후원제에 동참한 이유였습니다. 그동안 그가 개인적으로 구독 나눔을 실천했다면 앞으로는 후원제를 통해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과 을 함께 보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젊은이가 종이 매체로 뉴스를 읽는 대신 포털이나 소셜네트워크 등으로 뉴스를 보는 상황을 안타까워했습니다. “또래들도 유튜브로 뉴스를 봐요. 검증되지 않은 가짜뉴스를 쉽게 믿기도 하죠.”

박씨는 의 존재 이유를 심층 보도, 깊이 있는 보도로 들었습니다. 제1229호 표지이야기 ‘세계 정상급 과학자의 특허 날치기’에 이은 제1233호 표지이야기 ‘특허는 너의 것’ 등이 박씨가 꼽은 심층 기사였습니다. “와 의 보도는 언론사(史)에 큰 획을 그었어요. 국민 권익을 옹호하고 독자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해줘야 해요. 그게 바로 언론의 역할이죠. 잘못이 있으면 집요하게 추적해 제도적으로 개선하는 게 의 힘이에요.” 그는 후원해줄 테니 의 질 높은 저널리즘을 유지해달라고 했습니다.

기자를 만난 이날도 박씨는 미용실에 간다던 배우자의 작은 가방 속에 그동안 모아둔 들을 넣어뒀다고 합니다. 미용실 주인과 손님들이 을 보기 바라는 그만의 구독 나눔 전략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친구가 운영하는 사무실에 들러 조용히 을 놓고 오기도 했습니다. “관심 있는 기사 제목을 보면 자연스럽게 기사를 읽지 않겠나 싶었어요. 제가 구독 나눔 후원을 할수록, 주변에 있는 좋은 사람들과 을 나눌수록 의 역할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믿어요.”

전남 여수에 사는 ‘구독 나눔’ 후원 독자 박길만(64)씨 인쇄소 사무실 탁자에 깔린 <한겨레21> 표지들.

전남 여수에 사는 ‘구독 나눔’ 후원 독자 박길만(64)씨 인쇄소 사무실 탁자에 깔린 <한겨레21> 표지들.

<font size="4"><font color="#008ABD">작은 도서관 등에 〈21〉 배치 계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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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사람이 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박씨의 바람처럼 도 구독 나눔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르면 10월쯤 구독 나눔 후원 대상자를 선정할 계획입니다. 을 보고 싶지만 여러 이유로 보기 어려운 청소년과 대학생, 저소득층 등 취약계층이 주로 이용하는 시설 또는 단체에 무료로 제공할 예정입니다.

2015년부터 최근까지 한시적으로 진행한 ‘1020 캠페인 사업’의 경우 구독료를 낼 여력이 없는 10~20대 모임에 후원금을 모아 을 무료 배송해줬다면, 구독 나눔 후원 대상자는 나이에 제한을 두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이 을 볼 수 있게 작은 도서관 등 다양한 시설과 단체를 대상으로 하는 방식을 검토 중입니다. 숫자를 보면 탐사·기획·심층보도 등 취재 후원이 더 많지만, 다달이 60부 이상 후원(9월5일 현재)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박씨는 서울로 돌아가려는 기자에게 오히려 되물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일부 독자 또는 청취자가 자발적으로 거액을 후원한다고 들었어요.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언론을 만들기 위해 후원한 거로 알고 있어요. 저도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을 후원하는데 왜 우리나라는 그런 통 큰 사람이 없을까요?”

여수=조윤영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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