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국민연금 수령액을 정확히 기억하고 계신다. 26만8400원. 일을 그만둔 팔순 노인에게 더욱 귀한 돈이어서 그렇지 싶다. 1988년 시작된 연금이 1997년 농어촌으로 확대될 때 이장 댁에서 가입신청서에 서명했다. 4만원 안 되던 보험료는 조금씩 올라 막판 6만원을 넘겼다. 몇 년을 붓고 나서 받기 시작한 연금은 이미 낸 보험료의 몇 배에 이른다.
자식보다 더 효자 노릇 하는 연금을 어머니는 받지 못한다. 이거다 싶어 어떻게든 가입하려 했지만, ‘(남편이) 죽으면 대신 타면 된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서 포기했다. 고향 마을 노인 가구 가운데 배우자 한 사람만 가입한 경우가 태반인 이유다. 부모님 둘 다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마을에 위기가 찾아왔다. 아버지가 연금에 가입한 지 1~2년 지났을 때란다. 구석진 마을에까지 “연금이 곧 망한다는 풍문이 퍼졌다”고 했다. 그때 이웃 보현네는 연금을 해지했다. 그의 뒤를 따른 이들이 있다. 그 가운데 아버지의 형도 있다. 뉴스는 큰아버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연금이 1조원인가 적자를 봤다는 거야. 아마 방송 뉴스였을 거야. 불안해서 돈을 도로 찾아버렸지.” 정부가 하는 일을 믿지 못하는 세태는 풍문에 날개를 달아 많은 사람이 연금을 해지하도록 내몰았다. 다행히 큰아버지는 자식들의 도움으로 보험에 재가입해 지금은 따박따박 연금을 받고 있다.
다시 ‘풍문’이 떠돈다. 기금이 곧 바닥난다고 호들갑이다. 연금을 믿을 수 없단다. 기금이 예상보다 3년 이른 2057년에 고갈될 수 있다는 추계 결과가 낳은 파장이다. 피를 토하듯 연금 불신론을 펴는 이들의 대부분은 그때까지 살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미래 세대를 위한 배려와 걱정이 참으로 끔찍하다. 불안을 확산하는 풍문은 사심 없이 만들어졌을까.
연금을 믿지 말라는 이들이 도대체 뭘 믿으라는 건지 살펴보면 답이 나온다. 국민연금 불신으로 펀드에 뭉칫돈이 쏠린다는 등의 기사에 그들이 믿고 의지하려는 대상이 숨어 있다. 풍문의 바닥에 국가 대신 시장을 앞세우는 이념이 깔려 있다. 이참에 연금을 폐지하자거나 연금 성격을 확 바꾸자는 목소리로 나타난다. 국가 차원의 강제 저축 방식인 연금보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노후 준비를 맡기자는 얘기다. 자율에 맡기면 돈은 어디로 갈까? 미래를 위해 저축되기보다 현재 소비되거나 불안한 노후 대비를 광고하는 민간 보험사로 흘러갈 게 뻔하다.
불신론 최전선에 언론이 있다. 공교롭게 10여 년 전에도 그랬다. 노무현 정부 때, 연금도 정부도 믿을 수 없다는 언론 기사가 쏟아졌다. 불신론을 기폭제로 이슈가 폭발하는 현상이 유독 진보정권에서 반복되는 건 이채롭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슈 증폭의 주체는 진보정부에 책임을 덧씌우는 정치적 보수주의 언론과 연금의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하는 경제적 시장주의 언론의 결합체다.
최초 설계대로 연금 방식을 유지하는 건 분명 불가능하다. 고령화와 저출산 등 국면마다 부닥치는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내야 한다. 기금이 바닥나는 시점의 단축과 이와 맞물린 보험요율 인상, 지급액 삭감, 지급 시기 연장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럼에도 현세대뿐만 아니라 후세대를 위해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사각지대에 있는 연금 미가입자 문제도 풀어나가야 한다. 해법을 쉽게 찾기 어려운 탓에 사회적 합의가 더욱 절실하다. 불신 증폭으로는 갈등만 키울 뿐이다.
아버지가 다니는 경로당에는 연금을 받지 못하는 노인 서넛이 있다. 그들은 20년 전 풍문의 희생자였다. 이는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의 이야기다. 방방곡곡 비슷한 이야기가 또 얼마나 많겠는가. 풍문이 다시 변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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