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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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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4를 읽고

등록 2014-01-18 14:16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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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선 종이 한 장 차이

언젠가 남산에 올랐다가 빵 터졌다. 사람도 많이 다니지 않는 길목을 지키고 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복을 위아래로 갖춰입고 시선이 보이지 않게 선글라스도 썼다. 고엽제 전우회 소속의 할아버지였다. 그 할아버지를 발견한 뒤에야 아무 생각 없이 걷던 길 양쪽에 ‘종북 척결’ 운운하는 현수막들이 내걸려 있었음을 알아챘다. 몇 년 전 한 방송사에선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한민국어버이연합회 소속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접하기도 했다. 카메라 속 할아버지는 자신이 나온 사진 기사들을 스크랩해 ‘소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작진에게 자랑하듯 보여줬다. 그 기사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포토2 ‘고스트버스터즈 2014’와 같이 그들을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때 할아버지는 말했다. “그래도 여기(어버이연합회) 아니면 우리 같은 늙은이들 받아주는 곳도 없어.” 아들이 가끔 한 번씩 찾아온다는 그의 좁은 방은, 그들이 군인 코스프레를 하고 각종 집회에 따라다니며 맞불을 놓는 이유를 어렴풋이 말해주는 듯했다. 그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는 것은 남산도 대한민국도 아닌, 그런 극단이라도 붙잡지 않으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자기 자신이 아닐까. 특집 ‘수도권이 늙고 있다’ 속 우울한 노인들과 성난 ‘고스트버스터즈’들은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이은지 상남자 상남

‘상남’이의 ‘상남자’스러운 발언으로 시상식장이 환호했다. ‘인물탐구_ 안 만나도 다 알아?’에서 말하듯, 한주완의 수상 소감이 좀더 큰 울림을 준 이유는 그가 사용한 언어 때문이었을 것이다. 푸른 작업복이나 하얀 헬멧이 연상되는 단어, ‘노동자’. 돈으로 돈을 버는 자본주의의 고수가 아닌 이상 모두가 노동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단어가 공부하기 싫어하는 청소년들을 겁주는 ‘호랑이’ 정도의 존재가 된 것 같다. 한주완의 자기소개가 참신하고 개운했던 것은, 그것이 ‘노동자’라는 단어에 달라붙은 검은 기름때를 벗겨냈기 때문이 아닐까. 이번호에는 ‘데모’ ‘고령화’ ‘좌익’같이 찌든 때가 달라붙은 단어가 많이 등장했다. 상남이가 꼼꼼하게 골라온 말처럼, 의 글이 편견의 묵은 때를 말끔히 벗겨낼 날이 곧 오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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