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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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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쉬겠어요

등록 2013-07-10 11:36 수정 2020-05-03 04:27

질문은 ‘못 쉬겠어요’입니다. 수능 때까지는 아무리 방학이어도 학원에 보충에 바빴고 수능 끝나고서는 아르바이트하느라, 학기 중에는 과대표 하면서 바쁘게 보냈는데요. 그렇게 쉼을 바랐는데 막상 종강하니까 정말 모르겠어요. 두 달이라는 시간이 막막하게만 느껴진달까요, 할 일 없이 늦잠만 자는 일상이 너무 지겨워요.(20대 여대생)
한겨레 곽윤섭

한겨레 곽윤섭

마감 시간에 맞춰 기사를 쓰느라 1시간밖에 자지 못했는데 ‘못 쉬겠다’는 질문에 답해야 하니 ‘인지부조화’를 온몸으로 느낍니다. 지난주에는 정말 피곤했어요. 헬스를 시작해 팔다리가 쑤시는데다 다이어트한다며 술까지 줄여 뻗치는 스트 레스를 감당할 방법이 없었답니다. 그래도 마감 시간을 얼추 맞췄고 12시간 뒤 면 주말이라는 기쁨에 기꺼이 답을 찾아나서겠습니다.

독자님은 ‘크로노스’를 벗어나 ‘카이로스’를 추구하길 바라시는군 요. 헬라어로 시간을 뜻하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연스 레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와 특별한 의미가 담긴 시간 인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가 누구나 경험하는 객관적 시간이 라면, 카이로스는 각각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주관적 시간입니 다. 짧은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던 시간을 그 리인스인들은 카이로스라 부른답니다. 크로노스 시간만 받아들 이는 수동적 삶을 사는 게 독자님은 지겹다는 말씀이시죠?

그러나 김현철 전문의(정신건강의학)는 에서 크로노스 개념을 상실하면 카이로스의 노예가 된다고 경고합니 다. “시간의 흐름조차도 정복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면 그 순간부터 시간은 우 리를 철저히 외면한다. 매사에 지나치게 의미를 두며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 시키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면 크로노스의 차가운 복수가 시작된다. 바로 제풀 에 제가 지치게 만들어버리는 거다. 원대한 계획과 포부를 세웠다가 결국 뜻대 로 되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고 자신에게 실망한 나머지 제 시간에 먹고 자는 규 칙적인 일상의 습관마저 무참히 깨지게 된다.”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카이로스 의 내일만큼이나 유유자적하는 크로노스의 오늘도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독일 조형예술대 한병철 교수도 에서 비슷한 지적을 합니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 자본주의 진 화로 탄생한 ‘성과사회’의 그림자입니다. 더 큰 성과를 올려서 더 큰 성공을 거두 고자 하는 개개인의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자본주의는 전체적인 생산성을 극대 화했지만 성과 주체인 자기 자신은 착취를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가해 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과잉활동, 과잉자극에 맞서려면 사색적 삶, 영감을 주는 무위와 심심함, 휴식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한 교수는 말합니다. 할 일 없이 늦잠만 자는 지겨운 일상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삶이라는 겁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오늘의 휴식을 맘껏 즐기십시오. 그래야만 특별한 체험도, 큰 성공도 내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건 개인적인 경험이기도 합니다. 아픈 허리에 팔을 밀어넣고 24시간 내리 잠을 잤던 20대 여대생의 게으름이 시간을 쪼개 취 재하고 밤새 기사를 쓰는 30대 여기자의 생활로 나아가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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