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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으로 물건 주고받아 구멍가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등록 2012-05-23 11:50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 김진수

한겨레 김진수

Q. 어릴 적 ‘점빵’이라고 불리던 동네 가게는 왜 ‘구멍가게’라고 하게 되었나요? 처음에 구멍으로 물건을 주고받아서일까요? 어원이 궁금합니다.(목동의 철이)

사실 저, 고스톱 칠 때 ‘몰빵’(올인)해서 후회한 적은 있는데, ‘점빵’이라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어릴 적 살던 서울 변두리 동네에는 ‘구멍가게’라고 부르는 철이슈퍼와 개미상회만 있었죠. 두 가게는 나름 ‘킬러 콘텐츠’가 있었습니다. 철이슈퍼에는 쪼그리고 앉아 하는 오락기가, 개미상회에는 조미료 팍팍 친 떡볶이가 유명했죠. 짭짭.

입맛 그만 다시고, 철이님 질문의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섬아저씨’ 기자에게 제주도에서도 ‘점빵’이라는 말을 쓰는지 물었습니다. 섬 기자, “어릴 적에는 썼는데 ‘급속한 근대화 과정’(상경)을 거치며 안 쓰게 됐다” 합니다. 반대편 옆자리에서 ‘와잎’과의 술자리로 내상을 입고 실신해 있던 X기자도 벌떡 일어나 거듭니다. “그거 인터넷 쳐보면 나온다규!” 인터넷에는 ‘점빵’이 가게를 일컫는 경남·북 또는 전라도 방언이라는 설명이 뒤섞여 있네요.

암, 이렇게 쉽게 풀릴 질문이라면 저희를 찾지 않으셨겠죠. 그래서 국립국어원에 물었습니다. 조남호 어문연구실장께서 온종일 자료를 찾아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점빵’은 ‘점방’(店房) 또는 ‘전방’(廛房)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두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읽다 보니 ‘점빵’이 됐다는 것이죠. 점방이나 전방 모두 ‘물건을 파는 가게’라는 뜻이고요.

그런데 ‘점빵’을 ‘구멍가게’로 부르게 된 이유는 석연치 않습니다. 오히려 ‘점빵’과 ‘구멍가게’는 규모가 좀 다릅니다. 오래전부터 어물전처럼 넓은 상점을 ‘전’(廛)이라 하고, 좀더 작은 점포를 ‘방’(房)이라 했기 때문이죠. ‘가가’(假家)는 왕이 행차하면 쉽게 허물 수 있도록 만든 가건물 상점이나 노점상을 가리키던 말이라 합니다. ‘가가’라는 말이 변해 오늘날 ‘가게’가 된 것이고요. 1914년 3월8일치 기사에는 “그러나 아무리 적게 한다 하더라도 권연갑이나 성냥가치나 벌려놓은 움 같은 구멍가게로야 백년 간들 무슨 지식이나 경험이 늘며 이익이 생기리오”라는 대목도 등장합니다. ‘움(토굴) 같다’는 표현을 보면, 정말 작은 상점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네요. 근거 없는 추측으로는, 예전에 가정집 담을 헐어 쥐구멍처럼 출입구를 낸 가게가 많아 구멍가게라고 불렀다는 ‘쥐구멍 확대설’과 점방의 점(店)을 점(点=구멍)으로 잘못 해석해 구멍가게로 쓰게 됐다는 ‘한자 까막눈설’도 있습니다(믿거나 말거나!).

심지어 더 놀라운 주장도 있습니다. 김종훈 19대 국회의원 당선자(새누리당)가 지난 4월 라디오 방송에서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눈에 익숙했던 서울시내 구멍가게가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고 말한 ‘구멍가게 멸종설’입니다. 그는 이미 구멍가게가 없어졌는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피해를 받았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했죠. 아, 그렇다면 20년 전 그대로인 ‘개미상회’는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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