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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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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애인을 부를 때 ‘자기’라고 할까요?

[독자와 함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등록 2011-09-06 09:21 수정 2020-05-02 19:26

Q.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하셨잖아요. 혹 답해주시는 기자분이 싱글이어도 노여워 마시고 대답해주셨으면 해요. 애인을 부를 때 왜 ‘자기’라고 할까요? 자기는 자신을 지칭하는 말인데. 그만큼 친근해서일까요,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만큼 그도 사랑하고 아낀다는 의미일까요? 애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궁금해졌어요. 왜 그럴까요?(Rabbit Seed)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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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일단 노여워하지 않습니다. 저 결혼한 사람입니다. 이 애정 행각 질문을 저에게 떠넘긴 이세영 기자도 결혼한 사람입니다. 둘 다 애인 없습니다. 노엽다기보다 서럽습니다. 어젯밤 늦게 퇴근하며 ‘임상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습니다. “자기야, 나 왔어.” 손발에 간까지 오그라들었습니다. 각오는 했지만 상상 이상이네요. 아내가 눈을 깜빡·깜빡·깜빡합니다. 평소 아내의 논버벌 퍼포먼스 독법에 의하면 눈 깜빡 세 번은 “이게 뭔 소리냐”는 의미입니다. “자기야, 나 왔어.” 한 번 더 합니다. 간이 아픕니다. 미쳤다고 칩시다. 아내가 다가와서는 킁·킁·킁 냄새를 맡습니다. 삼킁은 “이게 술 마셨나”라는 제스처입니다. “자기야, 나 왔어.” 한 번 더. 아, 미치겠다. “또 술 마셨냐?” 드디어 나올 게 나왔습니다. 이날 낮술은 고사하고 석양주도 한 잔 안 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맨정신은커녕 나간 정신에도 할 수 없는 말이 ‘자기야’라는 거죠. 15년 연애+2년 결혼생활 동안 ‘자기야’라는 말은 서로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금기어를 넘어 사어에 가까운 말.

애인이나 배우자에게 ‘자기’라는 말을 쓰는 경우는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 아닐까요. 주변에 물어봤습니다. 올해 결혼한 안인용 기자. “자기야라는 말 안 써?” 이 여자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 몰랐습니다. 오래전에 결혼한 김보협 기자. “자기라는 말 안 써? 그럼 어떻게 불러?” 이건 뭡니까. 떠넘 이세영 선생. “미쳤냐? 그런 말 쓰게.” 아, 드디어 안도가 됩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자기’(自己)는 ‘그 사람 자신’ 혹은 대명사로 ‘앞에서 이미 말했거나 나온 바 있는 사람을 도로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라고 풀어놓았습니다. 궁금증을 풀어주는 국립국어원 가나다 전화를 이용했습니다. “최근 애인이나 부부 사이에 ‘자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런 용법이 어디서 나온 걸까요?” 설명을 맡으신 분이 한참을 투닥투닥 무엇을 찾아보시더니 말합니다. “‘자기’는 원래 대명사입니다. 아마도 이를 확장해서 애인이나 배우자 사이에 호칭으로 사용하는 것 같은데요, 이는 화법상 인정하지 않는 말입니다.” “그래요? 그래도 일상이나 드라마에서도 많이 사용하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그래놓고서는…’과 같은 말이 있을 수 있죠. 이런 의미를 확장해서 호칭으로 쓰이게 된 것 같은데요. 표준화법에 어긋납니다.” 마지막으로 간을 쥐어짜서 한 번 더 물어봤습니다. “최근에 국어연구원에서 짜장면도 인정했잖아요? 자꾸 쓰다 보면 ‘자기야’도 인정할 날이 올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결론 났습니다. 삼인칭 대명사 ‘자기’의 용법이 어쩌다 보니 이인칭인 애인이나 배우자에게 사용된 겁니다. 자꾸 쓰시면 언젠가 표준화법으로 인정될지 모르겠네요. 뭐, 오그라드는 건 마찬가지지만요.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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