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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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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덜덜덜덜, 네가 부서질 때까지

등록 2008-07-10 00:00 수정 2020-05-03 04:25

▣ 김한림



내 나이 스물셋, 이 녀석 나이는 스물일곱.

나보다 나이 많은 이 선풍기는 나의 보물이다.

매년 무더운 여름, 시원함을 주기엔 2%, 아니 20%쯤 모자란 바람 세기와 작동할 때마다 덜덜거리는 소리(정지가 아닌 회전 동작에선 더더욱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소리를 낸다)를 감수해야 할 때면 “에잇, 이제 그만 갖다버리자!” 하다가도, 또 해마다 모셔두는 이유가 있다. 바로 현대식 선풍기가 갖지 못한 이 녀석만의 ‘미덕’이 있기 때문. 지난해부터 우리 집 여름을 책임지는 최신식 선풍기는 바람도 세고 조용하지만, 바람이 센 만큼 오래 쐬면 머리가 아파오고, 예약 타이머는 1시간·2시간·4시간밖에 선택할 수 없다. 반면 30년 가까이 된 이 애물단지 선풍기는, 10분에서 60분 사이를 자유롭게 선택 가능하도록 태엽처럼 돌려 설정하는 타이머를 탑재했다. 여기다 바람이 순하고 약해서 여름밤 몸이 쉬이 차가워지는 잠자리에서 틀어놓기에 제격이다.

또한 이 유용함은 우리 가족 중에서도 나만이 누릴 수 있으니, 바로 베개에 머리를 놓았다 하면 잠들어 업어가도 모르는 무신경과 꽉 막힌 잠귀 덕분에 덜덜덜덜 소리내는 선풍기의 몸부림쯤이야 자장가 삼아 잠들 수 있는 까닭이다.

모든 게 편리성, 효율성, 신속성만을 향해 쉼없이 달려갈 때, 이 녀석의 존재는 잊혀져가는 여유로움과 인간성을 생각해보게 한다. 무조건 발전, 개발만을 외친다고 해서 우리 삶이 더 행복해지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이 선풍기만 보더라도, 자주 고장나고 교체되는 요즘 것들보다 오히려 꾸준한 근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올해도 나보다 더 나이 드신 ‘귀하신 몸’을 창고에서 꺼내 방으로 들여놓으며 이런 단상에 잠시 빠져본다. 이번 여름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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