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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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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햇감자와 몽당 숟가락

등록 2008-05-02 00:00 수정 2020-05-03 04:25

▣ 황토 대전시 유성구 송강동


아침 햇살이 퍼지는 거실에서 감자 껍질을 벗기는 시어머니 손에는 풀잎처럼 얇디얇은 숟가락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했습니다. 내가 과일 깎는 작은 칼로 벗겨낸 껍질엔 허연 살점이 붙어 있지만, 어머니의 숟가락에서 떨어지는 건 정말 거무튀튀한 껍질뿐이었습니다.

‘어떻게 숟가락으로 저렇게 감자 껍질을 벗길 수 있을까?’ 갓 시집온 서울내기 며느리는 신기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숟가락이 요술을 부리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저도 숟가락으로 한번 해볼게요.”

숟가락만 있으면 며느리도 살점이 안 붙은 감자 껍질을 벗겨낼 줄 알았겠지요. 그런데 웬걸, 감자 위의 숟가락은 계속 겉돌기만 했습니다. 어머니가 껍질을 벗길 때는 어린아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듯 긁는 것 같았는데, 며느리는 왜 힘만 들고 숟가락은 자꾸 딴 짓만 하는 걸까요?

시댁 식구들은 감자가 많이 나오고 값이 내려가는 하지 즈음해서 감자를 상자째 사다놓고 쪄먹곤 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 손에서 요술을 부리던 얇은 숟가락은 아주 바빠졌습니다.

감자를 긁어대던 숟가락 모가지는 제 힘에 겨워 그만 부러졌나 봅니다. 숟가락도 귀하던 시절, 시아버님은 부러진 숟가락 모가지와 몸을 철사로 이었습니다. 은빛 철사는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새 감자 껍질 색으로 변했습니다.

시장에는 요즘 햇감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숟가락으로 감자 껍질을 벗기는 게 신기했던 20대 며느리는 어느덧 지천명을 앞둔 중년이 되었습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소박하게 살아오신 어머니도 이제 아흔이 넘으셨습니다.

감자 칼로 삭삭 껍질을 벗기면서 주방 서랍에 있는 몽당 숟가락을 꺼내봅니다. 아직도 나는 그 숟가락 사용이 불편하지만, 볼 때마다 시부모님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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