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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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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색시에게 건넨 다듬잇돌

등록 2007-06-29 00:00 수정 2020-05-03 04:25

▣ 김소정 대전시 서구 가장동

몇 해 전 이른 봄날, 친정집 뒤에서 딸아이와 감꽃을 줍다가 처마 밑에서 뽀얗게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이 다듬잇돌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이 아릿했다. 이 다듬잇돌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각별한 추억과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그대로 둘 수 없어 우리 집으로 가져다가 거실 한켠에 놓아두었다.

아버지 나이 서른 살 적, 혼기를 한참 지난 노총각이 스무 살 어머니를 각시로 맞이하고 보니 그렇게 이쁠 수가 없으셨단다. 그 고운 색시가 풀 먹인 옷가지나 이불 홑청을 들고 이웃집에 다듬이질하러 가는 게 싫어서 아버지는 며칠 동안 나무를 해서 장에 내다팔아 그 돈으로 다듬잇돌을 사오셨단다. 이 커다란 돌덩이를 지게에 얹고 시오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뜻밖의 선물을 받고 좋아할 색시 생각에 무거운 줄도 모르셨다던 아버지. 다듬잇돌을 보고 환하게 웃는 어머니 모습에 당신이 더 많이 행복하셨다던 아버지.

6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그 지순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고 여든의 어머니는 다듬이질을 잊으셨다. 이제는 내게로 와서 나의 애장품이 된 이 다듬잇돌을 평소에는 화분 받침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실생활에 쓸 때도 있다. 다림질할 수 없는 청바지나 두꺼운 셔츠를 탈수해서 가지런하게 개서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양발로 꼭꼭 힘주어 밟으면 잔주름이 말끔하게 펴지면서 옷의 모양을 잡아준다. 그럴 때마다 나도 어머니처럼 멋있는 다듬이질 소리를 내며 두드려보고 싶다는 엉뚱한 충동이 일지만 도심의 아파트에서 어디 될 법한 소리인가. 그저 햇살 가득한 창가에 놓고 그 위에 바이올렛이나 작은 화분을 올려 아름다운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가만히 손끝으로 다듬잇돌을 만지면 젊은 날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르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위해 첫 선물을 마련하시던 아버지의 따스한 마음결이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청량하고 경쾌한 어머니의 다듬이질 소리가 들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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