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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전화기록부 속의 나

등록 2007-06-22 00:00 수정 2020-05-03 04:25

▣ 김소영 서울시 관악구 신림9동


‘뭔가를 오래 간직한다.’ 이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 일인데, 이 전화기록부는 나와의 인연이 길다. 지금 중학교 2학년인 큰애가 다녔던 놀이방 번호가 있는 것으로 봐 10년은 넘은 게 확실한데 정확히 언제부터 갖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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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나 그때나 광고가 드러나 있는 것은 그냥 넘기지를 못해, 누군가로부터 이 전화기록부를 받고 나서 처음 한 작업이 화이트로 표지의 로고 부분을 지우는 일이었다. 앞장의 흰 부분이 바로 그것인데, 지우고 난 뒤에는 집에 있던 가장 좋은 펜으로 반듯하게 전화번호를 적었다. 첫날 이후로 적힌 번호들은 상황에 따라 색도 크기도 가지각색이다.

서너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도 전화기 옆을 고정자리로 하고 있었건만, 최근엔 통 쓸 일이 없다가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뒤 요긴하게 사용했다. 인간관계가 넓지 않아 예전에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 지금까지 친분이 있어서 덕을 봤는데, 적다 보니 네모로 까맣게 칠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그 안에 10년 전의 내가 보였다. 누군가 싫어지면 연관된 모든 물건을 치워버렸던 꼬장꼬장하고 융통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없던 젊은 내가 있었다.

지금이라면 그냥 삭제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끝났을 텐데, 그때는 다른 번호들 때문에 버리지도 못하고 지우기 위해 덧칠하느라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흔적 없이 지워지는 디지털의 산뜻함이 좋다고 생각했건만, 어느새 나이가 들었는지 아니면 시간과 더불어 감정이 사라진 건지, 오랜만에 되돌아온 기억이 마냥 반가웠다. 이제는 주로 딸과 아들이 이 전화기록부를 이용한다. 앞으로 강산이 두서너 번 바뀌면 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이들의 기억이 나를 또 행복하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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