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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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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오래된물건 ] 순수한 땀이 벤 자원봉사 티셔츠

등록 2006-11-04 00:00 수정 2020-05-03 04:24

▣ 박병율 경북 경산시 진량읍

딱 10년 만이다. 오래전 장롱 속 깊이 넣어뒀던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PIFF) 자원봉사자 티셔츠를 꺼냈다. 나는 부산을 떠났지만, 본가에 계신 어머니는 이 옷을 장롱 속에 고이 간직했다. 좀이 쏠까봐 나프탈렌까지 꽉꽉 집어넣어가며.

대학 3학년 때, PIFF라는 갓 태어난 벌거숭이 아기를 만났다. 그때는 PIFF가 당당한 성인으로 자랄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서울 고관대작의 자식이 아닌, 부산 어느 해변가 어부의 그렇고 그런 아이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자원봉사자 역시 한 장짜리 서류에 서명한 사람이면 누구나 됐다. 대부분 부산 지역 대학생들과 소시민들이었다.

하지만 시작과 함께 열정이 폭발했다. 전국에서 영화광을 자처하는 관객이 몰려들었다. 스크린에 비가 내리고, 번역이 부실하고, 필름이 도착하지 않아 아예 상영 취소가 되는 일도 허다했지만 그들은 항의를 했을망정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이같은 반전에 모두가 놀랐다. 스태프도 자원봉사자도 관객도.

9일간의 축제가 끝나던 날, 자원봉사자와 관객은 텅 빈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한데 어울려 밤을 지새웠다. 깡소주에 오징어. 돌아보면 그때만큼 순수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름대로 잘 보관했건만 티셔츠도 10년 세월을 견딜 수는 없었나 보다. 곳곳이 쭈글쭈글해졌고, 누렇게 색이 바랬다. 나도 이 티셔츠만큼 바래고 주름이 생긴 것은 아닐까. 얼굴에, 마음에 그리고 순수했던 열정에…. 20년이 되는 때에 다시 꺼내보려 한다. 그때쯤 되면 내 아이에게 아빠가 저 유명한 국제영화제의 초대 ‘자봉’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으려나. 그리고 그때처럼 여전히 열정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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