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1989년 중3 때 <핑크빛 체리> <사랑해 롯데>라는 순정 만화책을 보고 흉내내어 그린 그림입니다.
결혼 뒤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살아가면서 못 보던 건데, 지난해 집안 정리를 하다가 찾아냈습니다. 처음 봤을 때 아내의 작은 비밀을 발견한 것 같아 너무 신기하더군요. 보고 있자니 중3의 귀여운 여자아이가 한획 한획 정성 들여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제 머리 속에 그려지면서 아내가 새삼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제 중학교 시절도 같이 떠오르며 아련해지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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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한쪽 귀퉁이와 뒷면을 보면 깨알 같은 글씨로 줄거리가 적혀 있습니다. 예쁜 주인공들은 물론 그 줄거리조차 잊기 싫었는지 부연설명을 덧붙여가면서 아주 자세히 적어놨네요. 대충 봐도 뻔한 삼각관계와 이루지 못할 사랑과 우정을 그리고 있는데, 그 시절 감수성이 풍부했을 열여섯 살의 아내가 여러 날 가슴을 태웠을 거라 생각하니 웃음이 납니다.
커다란 물방울 눈동자에 풍성한 금발 머리숱, 길쭉하게 과장된 다리, 뾰족한 턱선…. 매일 밤 자신이 만화 속 주인공 체리나 롯데가 되는 상상을 하면서 가슴 아픈 사랑과 멋진 우정을 겪는 꿈을 꿨던 중3 여학생은 지금은 딸아이의 엄마가 됐습니다. 자신이 그리던 이상형과 정반대인 철모르는 한 남편의 아내이기도 하고요. 정성스럽게 연필로 그림을 그리던 손은 이제 빨래와 설거지, 집안 청소로 그 꼼꼼함의 맥을 이어가고 있지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세상에 대한 달콤한 환상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까요. 혹시 있다면 계속 지켜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계속 지키고 있으라고 말해주렵니다.
라준호/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율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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