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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잘도 재잘거린다

등록 2005-10-20 00:00 수정 2020-05-03 04:24

10여년 전, 우연히 선배 방에 놀러갔다가 이놈을 만났다. 소니사의 워크맨이 인기를 끌던 그때, 투박하고 무식하게 생긴 직사각형의 보잘것없는 이 단파 라디오는 나에게 ‘신기’ 그 자체였다.

선배는 이놈으로 <cnn>이며 <voice of america>(미국의 소리) 등 미국 영어 방송을 듣는다고 했다. 영문과였던 그 선배는 영어를 그렇게 공부했다.
며칠 뒤, 나도 영어를 공부하고 싶어졌다. 학원 다닐 돈으로 용산 전자상가에서 이놈을 구입했다. 지금 기억으로 5만~6만원은 했던 것 같다. 그 뒤 이놈은 아침에는 모닝콜을, 저녁에는 수면제 역할을 톡톡히 하는 귀여운 친구가 됐다. 오성식의 <굿모닝 팝스>를 들으며 아침을 맞이했고,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하루를 정리했다.
시대가 변해 더 이상 이놈이 필요 없게 됐다. 몇년 전부터 영어 공부는 MP3 플레이어로 하거나, 그것마저 귀찮아서 안 한다. 그러던 내가 이놈을 다시 꺼내든 건 순전히 ‘나이 탓’이다. 나이와 노스탤지어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서른이 가까워지면서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멀리하고 무식한 이놈을 가까이한 이유다. 이제 영어 공부는 안 하지만, 저녁 늦게까지 음악 방송을 듣는 것이 습관이 됐다. 뉴스도 라디오로 듣는다.
아주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라디오가 세상으로 나가는 유일한 창구였다. 대형 건전지 네개를 꽂아야 살아 숨쉬는 무식한 라디오가 있었을 뿐이다. 라디오의 ‘뚜뚜뚜’ 하는 시보음을 들으며 아버지는 밖에 일하러 나가실 채비를 했고, 난 졸린 눈을 비비며 고양이 세수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일까. 이놈의 단파 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아련한 나의 추억이 종종 오버랩된다. 그래서 이놈의 또 다른 역할은, 추억 재생기!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시끄럽게 재잘거린다. 잘도.

서정표/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
</voice></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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