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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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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저 절제된 디자인을 보라

등록 2005-09-02 00:00 수정 2020-05-03 04:24

내가 아직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았을 무렵, 네살 많은 초등학생 오빠가 어느 날엔가 가슴에 꼭 안고 나타난 것이 있었다. 얼굴 한가득 자랑스러운 표정을 하고 책상 위에 떡하니 내려놓은 것이 바로 독서대.

그날부터 오빠는 책상에 앉을 땐 꼭 독서대를 펴서 그 위에 책을 펼쳐놓고 보았다. 커다란 교과서가 독서대 위로 안정되게 받쳐져서 연출되는 바른 자세. 그 자세가 초등학생 오빠를 꽤 의젓해 보이게 했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이 독서대에 눈독을 들이게 된 것은!

나는 그 뒤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고개를 숙이고 보면 목이 아프다며 오빠가 안 쓰는 틈에는 빌려다가 잽싸게 내 책상으로 옮겨다 놨고, 친구 집에 놀러갈 때는 난데없이 독서대를 펴 의젓한 자세를 자랑했다. 그렇게 서서히 독서대에는 오빠 것보다는 내 손때가 더 많이 묻어갔고, 오빠에게는 독서대의 존재감이 약해졌을 무렵 슬그머니 독서대는 내 방으로 옮겨왔다. 이제야 말이지만 정말이지 독서대가 있으니 공부가 훨씬 잘되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취업 준비를 하는 요즘에 이르기까지 20년이 넘은 이 조그만 독서대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책들이 거쳐갔다. 다리가 약해서 무거운 책들은 사이에 끼우기도 전에 쓰러져버리지만, 지금까지 내가 봐온 책들을 훤히 꿰뚫고 있다.

도서관 책상마다, 어떤 책에도 절대 쓰러질 것 같지 않은 튼튼한 독서대들이 즐비하고, 세련된 독서대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는(?) 깜찍한 보라색 독서대가 내겐 해를 거듭할수록 값을 더하는, 정말 오래된 보물 같다. 여기저기 때가 끼고 녹이 슬었지만, 그 어떤 독서대에도 지지 않을 저 절제된 디자인 하며(중간에 책 중심부를 받치도록 디자인된, 꼭 필요한 부분에만 모양을 낸), 접어서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는 간편성을 보라! 믿지 않을진 모르겠지만 도서관에서 잠시 외출할 땐 어김없이 독서대부터 단속한다. 얇아서 책 사이에 숨겨두면 딱이다!

이현정/ 경남 양산시 웅상읍 주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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