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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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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바람

등록 2017-01-10 16:15 수정 2020-05-03 04:28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태어난 메리 엘리자베스 프라이(1905~2004)는 3살 때부터 고아로 자랐다. 12살 되던 해, 메릴랜드주 볼티모어로 옮겨왔고 이후 꽃가게를 열었다.

결혼해 가정을 이룬 27살 무렵, 그의 집에는 독일에서 이민 온 유대인 세입자가 있었다. 젊은 세입자 마거릿 슈워츠코프에겐 고국에 두고 온 노모가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독일 나치의 반유대인 정책 때문에 그 곁에 갈 수 없었다. 어느 날 부엌에 마주 앉은 마거릿이 울면서 프라이에게 말했다. “가장 슬픈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어머니 무덤 앞에서 ‘잘 가시라’고 인사할 수 없는 거요. 그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거요.”

꽃을 가꾸며 살아온 선량한 프라이는 외로운 고아로 자란 제 처지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프라이는 시를 쓰거나 공부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문장들이 갑자기 떠올라서” 갈색 쇼핑 봉투에 글을 적어 마거릿에게 건넸다. “이게 위로가 될지 모르겠네요.” 글을 읽은 마거릿은 울음을 멈췄다. “이 글을 평생 간직할게요.” 1932년의 일이다.

소박한 글은 입소문을 탔다. 주변 사람들이 두루 좋아했다. 위안을 주는 글이었다. 프라이가 이 글을 창작한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 전승되던 시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중에 제기되기도 했다. 어쨌건 정식 출판도 되지 않은 짧은 글의 원작자를 따져 묻는 이는 없었다. 프라이는 그것을 읽어보자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글을 적어 보여줬다.

글은 돌고 돌았다. 사람들은 그 시에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라는 제목을 붙였다. 누가 어떻게 쓴 글인지 아는 이는 없었다. (1998년에야 어느 언론인의 추적 조사를 통해 프라이가 원작자임이 밝혀졌다.) 죽은 이를 기리고 살아남은 자를 위로하려는 사람이면 누구나 시를 낭송했다.

우연하게 쓰여 우연하게 회자되던 시에 또 다른 우연이 겹쳤다. 1989년, 독립투쟁을 벌이던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폭탄 공격으로 24살 영국군 병사 스티븐 커밍스가 죽었다. 무력 충돌의 긴장 가운데 죽음을 예비했던 것인지, 그는 ‘사랑하는 모든 이’를 수신자로 지정한 편지 한 통을 남겼다. 편지 끝에는 시가 적혀 있었다.

스티븐의 아버지는 아들 장례식에서 그 시를 낭독했다. 그 장면을 BBC가 방송했다. 이후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가 됐다. 수많은 방송과 영화에서 시가 읽혔다. 2002년, 9·11 희생자 1주기 추도식에서도 낭송됐다. 전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퍼져갔다.

시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본 문단에서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작가 아라이 만은 어느 날 그 시를 읽고 마음을 뺏겼다. 암으로 아내를 잃고 괴로워하는 친구가 떠올랐다. 재주 많은 아라이는 작곡과 노래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친구를 위해 일본어 노래로 만들어 2003년 발표했다. 제목은 ‘천의 바람이 되어’(A Thousand Winds).

이윽고 한국에도 그 시가 도착했다. 2009년 팝페라테너 임형주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려고 아라이의 노래를 번안해 발표했다. 제목은 ‘천 개의 바람이 되어’로 붙였다. 그리고 2014년 4월25일, 세월호 참사 추모곡으로 다시 헌정했다.

영국 일간 는 “상실을 위로하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고 이 시를 평했다. 비밀은 시를 들려주는 이에게 있다. 많은 추모시는 산 자가 떠난 이를 기린다. 반면 이 시는 떠난 이가 살아남은 이를 위로한다. 산 자들은 그 시를 낭송하며 위로받는다. 또한 위로를 남기고 떠난 이를 다시 그리워하게 된다. 무한한 슬픔과 위로의 순환이 시에 깃들어 있다.

슬픔에 동조하고 위로에 보탬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1천 일을 보내려 했다.

2014년 4월16일 참사 직후 발행된 제1008호부터 이번 제1145호까지 지난 1천 일 동안 은 모두 136차례 정기 발행됐다. 그 가운데 16차례 발행본에서 세월호 참사를 표지 기사로 다뤘다. 표지 기사를 포함해 참사 관련 기사를 게재한 것은 82차례다. 칼럼 등을 제하고, 본격적으로 참사를 다룬 기사만 모두 282건이다. 그 밖에도 참사 100일, 1주기, 2주기, 그리고 이번 1천 일을 맞아 호외 특별판을 만들었다.

그러나 1천 일의 슬픔에 걸맞은 1천 개의 위로를 준비했다고 자부하진 못하겠다. 어느 언론사보다 월등히 많은 기사를 썼고, 가장 많은 특종을 내놓았으며, 가장 체계적으로 접근했다고 자부하지만, 그 성취를 인정받아 몇몇 언론상까지 받았지만, 세월호를 뜬눈으로 지켜본 시민 모두에게 결정적 위로가 되진 못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진실의 전모는 드러나지 않았다. 슬픔은 진실과 함께 아직 동거차도 앞바다에 가라앉아 있다.

다시 기사를 준비했다. 1천 개의 기사를 쓸 때까지 이 추적을 계속한들 무엇이 문제겠는가. 떠난 이와 유족, 피해자와 그 가족, 그리고 그들과 함께 슬픔을 나눈 시민들에게 속시원한 위안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가슴 아플 뿐이다.

하여 여기에 시를 옮긴다. 80여 년 동안 전세계 슬픈 이들을 위로한 글이다. 한국어로 번안한 노래 가사도 물론 좋지만 (노래 가운데는 오연준·박예음이 부른 버전을 추천한다. 세월호 아이들이 직접 부르는 것 같다. 우연히 그 노래를 처음 듣던 날, 속울음을 참느라 매우 애를 썼다) 서툰 번역이나마 영어 원문을 옮겨, 천 일 동안 천 개의 희망을 안고 살아온 모든 이에게, 그리고 천 개의 바람으로 살아남은 떠난 이에게 드린다. 천 개의 기사로 그들 모두를 와락 껴안을 날을 소망하면서.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지 않았어요/ 나는 천 개의 바람이죠/ 나는 불어오는 천 개의 바람이에요/ 나는 눈 위에 빛나는 다이아몬드예요/ 나는 무르익은 곡식 위에 내리는 햇볕이에요/ 나는 부드러운 가을비예요/ 당신이 아침의 고요 속에 깨어났을 때 나는 둥근 원을 그리며 하늘로 비상하는 조용한 새예요/ 나는 밤에 빛나는 부드러운 별이죠/ 내 무덤 앞에 서서 울지 말아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죽지 않았어요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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