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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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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 기타로 촛불을 태우자?

등록 2004-12-24 00:00 수정 2020-05-03 04:23

8·9기 독자편집위원들이 돌아본 2004년… 이라크와 경제불황에 울고 딸과 이주노동자의 희망에 웃네

2004년이 저물어 갑니다. 한해동안 이 담아낸 사회 이슈들이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남겨둔 지금 독자들에게 무엇이 되어 남아있을까요. 희망과 기쁨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분노와 안타까움을 보태드린 걸까요. 은 12월의 마지막 길목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독자들의 시선을 좇아봅니다. 8·9기 독자편집위원들의 입을 빌어 이 한해 동안 그려낸 나이테를 짐작해봅니다. 편집자

촛불은 계속 타오른다네/ 곽동운·9기 독자편집위원

2004년 봄, 나는 탄핵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당시 총선물갈이연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물갈이연대 사무실은 광화문에 있었다. 인왕산이 노을을 삼키면, 빌딩에서 쏟아져나오는 넥타이부대에 뒤섞여 광화문 한복판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촛불을 밝혔다. 501호 표지 제목처럼 분노를 희망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 희망을 비추기 위해서 촛불을 들었다. 파편화된 개인이 각자의 희망을 품는 것보다 모두 함께 희망을 꿈꾸는 게 나았기에 광장 위로 촛불은 올려졌다.

노무현이 이뻐서가 아니었다. 한홍구 교수 말대로 ‘똥’을 확실히 처리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해우소에 갈 녀석들이 국민들의 식탁에 짝퉁 된장찌개, 짝퉁 청국장으로 올려진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소리 아닌가. 그랬다. 탄핵 정국, 4·15 총선은 수구와 보수를 분리해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일정 정도 정치판 물갈이를 이룬 4·15의 촛불은 그렇게 제 역할을 다했다.

설레는 성탄절을 앞둔 12월, 나는 다시 광화문 주위를 서성인다. 이제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촛불을 밝히기 위해서다. 지난 봄보다는 훨씬 적은 수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희망을 노래한다. 56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눌어붙어 있던 국가보안법을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해우소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메이드 인 개성공단’ 냄비에 담긴 진짜 된장찌개를 안심하고 먹을 게 아닌가.

지하철역에 가려면 항상 보수 언론사를 지나치게 된다. 갑자기 ‘저 회사가 밤 시간에 제일 싫어하는 게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정답은 촛불! 이제까지 우리가 희망을 노래하며 든 촛불은 그들에게는 화형식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화염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여중생, 탄핵, 파병 반대, 국보법 폐지. 그 불빛들이 얼마나 싫었을까? 그래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촛불은 계속 타오른다. 열린우리당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것이 희망의 역사이기에 촛불을 드는 것이다.

성매매 종사자, 힘냈으면!/ 김무늬·9기 독자편집위원

여성의 성매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시대와 역사를 달리하여도 바뀌지 않고 지속돼왔다. 그 시각은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렸을 때, 가끔 교회 가는 길에 보았던 가게들은 항상 문을 닫아놓고 있었다. 처음엔 일요일이라 문을 닫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다 어느 날 교회 행사를 준비하느라 밤늦게 집에 가면서 보니 그 가게들엔 빨간 등이 켜져 있고 큰 유리창 안팎으로 드문드문 여성들이 앉아 있었다. 너무 놀란 난 그곳을 빨리 지나쳤다. 왠지 그곳을 지나가는 것조차도 잘못이라 생각됐다. 그 뒤로도 그들을 그저 나와 다른 존재, 불쌍한 사람들로만 인식해왔다. 그래서 성매매특별법을 반겼고, 그들이 생존권을 외칠 때에도 그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 법이 그들의 생존에 어떤 타격을 주는지 생각지 않은 채, 그들이 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해주려는데 왜 그들은 기뻐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성매매 종사자와 여성계의 대담(530호 표지이야기 ‘성매매의 종말’을 원하는가’)을 읽고 난 내가 진심으로 부끄러웠다. 내가 그들을 같은 여성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로 구분지어왔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그 기사에서 성매매를 하는 주체, 남성이 빠져 있다는 사실에 허탈감과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성매매가 이렇게 번창한 건 그곳을 애용한 남성들 덕택(?)이 아닌가. 왜 그들은 이런 현상에 침묵하고 있을까.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성매매에 대해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여자가 어떻게”와 같은 모순된 시각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감마저 느꼈다.

그래서 난 성매매 종사자들이 국가의 부족한 정책을 탓하고 공창제를 주장하기보단 어떻게든 그곳을 박차고 나왔으면 하는 생각을 포기하지 못한다. 미흡한 제도 때문에 자립이 쉽지 않을지라도, 모두들 그렇게 힘들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더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줬으면 좋겠다.

나의 연말이 아프다/ 박정호·9기 독자편집위원

지역 방송사 기자로서 처음 맞는 연말, 항상 들뜬 마음으로 연말을 맞았던 나에게 올해 연말은 당장이라도 들것에 실려나갈 것 같은 기분을 주고 있다.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 꾸러미 대신 업무 꾸러미를 내던지는 직장 상사님들. 행사는 왜 이리 많고 만날 사람은 왜 이리 많은지 정신이 없다. 취재도 하고, 뉴스 앵커도 하고, MC를 하면서 성우 역할까지 해야 한다. 이렇게 정신없이 일을 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돈을 조금 준다. 열받는다.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지만 청년 실업자가 36만명에 이르는 현실이 나를 붙잡는다. 아직 갚을 돈이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이 했던 말들이 자꾸 떠오른다(535호 표지이야기 ‘한국경제, 양극화에 병든다’). 이 내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기 때문이다. 이 위원장은 지면을 통해 “괜찮은 일자리는 조금 생기고 패스트푸드 체인점 같은 저임금 저숙련 서비스 직종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싸구려 일자리가 많이 생기고 비정규직이 넘쳐난다. 내가 아는 동생도 대기업에서 일하는데 파견직이라서 월 30만원을 파견업체에 송금해야 한다고 한다. 많지도 않은 월급을 떼이는 이 동생은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내 일도 지상파 방송사 기자들과 비교하면 분명히 저임금 직업이지만 업무는 꽤 과중하다. 억울하다. 임금이 적으니 쓸 돈이 없고 업무가 많으니 쉴 틈이 없다.

이 위원장은 “양극화 문제 해결을 위해 10명 정도의 연구팀(TFT)을 꾸려놨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정부를 믿고 싶다. 정부가 추진하는 ‘한국경제 부활 프로젝트’가 꼭 성공을 거두어 경제 양극간의 격차를 줄였으면 좋겠다. 다시 한번 들뜬 마음으로 연말을 맞아보고 싶다.

주제: 나이 40, 베이스가 들렸다/ 김형진·8기 독자편집위원

70년대 말, 80년대 초 대학 그룹사운드들이 ‘7080’이란 이름을 달고 요즘 다시 나오고 있다는 소식에, 난 문득 1978년 내 중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514호 문화 ‘그룹사운드여. 부활하라!’) 제1회 해변가요제가 열리던 당시 난 배재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우수상을 받은 그룹 ‘블랙테트라’의 보컬 구창모가 학교 선배라는 사실에 친구들은 열광했고, 나도 그룹사운드 결성을 결심했다. 간신히 구한 작은 북 한 개 ‘드럼’과 중고 전자기타, 집에 있던 통기타와 전축 앰프로 구색을 갖춰놓고, 우리 집 2층에 모여 3인조 중학생 그룹사운드를 출범시켰다.

집과 악기를 제공한 난 당연히 보컬과 리드기타를 맡았다. 보컬·리드기타가 1지망, 드럼이 2지망, 그리고 전면으로 나서지 못하는 베이스기타가 3지망이었다. 베이스기타는 없어도 괜찮다는 게 그때 내 생각이었다. 우리 수준을 넘는 ‘휘버스’의 를 골라놓곤 한참 애를 먹었다.

1979년 10월, 등굣길에 있던 동양방송 앞에 탱크와 무장군인이 서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것이었다. 그 뒤 80년 광주 사태가 터졌고, 어느새 샌드페블즈의 는 금지곡이 됐다. 우리 그룹사운드도 흐지부지되고, 나도 기타를 놓게 됐다.

록사운드 같은 질풍노도의 유년기는 옛일이 되고, 방송사 PD로 매일을 살던 난 올해 한국방송 위성방송의 한 프로그램에 7080 대학가요를 소개하는 패널로 우연찮게 출연하게 됐다. 그리고 우리 그룹의 모범답안이었던 휘버스의 멤버들을 인터뷰하게 됐다. 키보드였던 정원찬씨가 “그건 내겐 추억이다”라고 말하자, 베이스기타를 맡았던 문장곤씨는 “내겐 아쉬움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베이스기타를 정말 잘 치고 싶어 이후 그룹 ‘건아들’에서도 활동했다고 한다.

문장곤씨의 말이 빙빙 돌면서 기사와 함께 예전의 욕망이 꿈틀거렸다. 즐겨듣던 7080 대학가요제 노래들에서 베이스 음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룹사운드의 밑바닥인 베이스기타. 화려한 기교가 없다고 천대했던 베이스기타 음이 불혹의 나이에서야 이해되다니. 유혹은 강렬했다. 유혹을 받아도 혹하지 않는다는 마흔에 말이다. 용기 내어 연락했다. “문장곤 선배님! 베이스기타를 배우고 싶습니다.”

흔쾌히 승낙해준 덕분에 퇴근 뒤 그에게 베이스기타를 배우고 있다. 나의 사부이신 문장곤씨가 말했다. “그룹사운드란 노래를 하는 사람과 반주하는 사람들이 모인 게 아니다. 모두 하나의 느낌을 만들기 위해 소리를 모으는 거다."

이라크 점령군 가슴에 꽃을/ 박진희·8기 독자편집위원

나는 아이 셋을 둔 엄마다. 아이를 낳은 뒤 여러 가지 변화를 겪었지만,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세상 모든 아이들에 민감해졌다는 거다. 길을 가다가도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면 한번 더 쳐다보게 되고, 아이들과 관련된 나쁜 기사를 보면 며칠씩 우울증에 시달린다. 그래서일까? 이라크 전쟁은 끊임없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 수니파 살람과 시아파 하이셈이 나란히 방한했다는 소식(538호 사람과 사람 ‘꽃을 들고 이라크로 오라’)을 보면서 나를 슬프게 하는 한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인터넷에서 본 그 사진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다. 철책이 쳐진 곳에 검은 봉투를 뒤집어쓴 채 앉아 있는 아버지. 포로인 듯한 그가 겁에 질린 아들을 진정시키고 있다. 봉투 속 아버지의 표정은 어떨까. 서러운 가시가 철책처럼 돋아나 있을 것 같다. 나 또한 자식을 둔 어미로서 그 고통을 알 것 같아 마음이 아려왔다. 전쟁은 이런 걸까. 잘못 하나 없는 어린 자식이 겁에 질리고, 어떻게 달래야 할지 부모는 알지 못한다.

평화를 수호한다며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평화가 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수많은 밤, 많은 이들이 평화의 촛불을 밝혔지만 남북 관계 운운하는 어쭙잖은 민족의식과 동맹국의 의리를 명분 삼아 한국군도 이라크로 달려갔다. 아이들의 팔다리가 잘리고 수많은 김선일이 죽어가도 다 평화의 과정이란다.

미국이 정말 세계 평화를 원한다면 ‘만리재에서’의 편집장 제안처럼 미군은 이라크에서 철군하고 팔레스타인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한국의 대통령이 부둥켜안고 울어야 할 사람은 무엇을 재건하는지 모른 채 무언가를 재건하고 있다는 군부대가 아니라 오늘도 가족을 잃어버리고 공포에 떨고 있을 이라크 아이들이 아닐까. 살람과 하이셈의 말처럼 꽃을 들고 이라크에 가고 싶은데 총 들고 막는 이가 너무 많다. 꽃을 들고 이라크인을 만날 수 없다면 80년대 최루탄을 쏘아대고 토끼몰이를 해대던 전경들의 가슴에 꽃을 꽂아주던 우리 어머니들처럼 점령군들의 가슴에라도 평화를 일러주는 꽃을 달아주고 싶다.

‘다름’과 ‘차별’은 다릅니다/ 김혁·9기 독자편집위원

2004년 8월 고용허가제가 시작되어 이주 노동자들의 올겨울이 넉넉하긴 힘들겠지만 샤밈, 아니 캄푸에게 보내준 온정은 희망을 얘기해준다. 이주 노동자를 향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다(526호 사람과 사람 ‘누가 이 외국인을 모르시나요’). 그들의 국적·인종·언어를 보면, 그들은 분명히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다름’이 불합리한 차별과 배타성으로 나타나니 안타깝다. 사회적 소수자에게 우리는 참 무관심하다. 해외에서 현지 문화에 적응하면서 정착해가는 한국인들이 늘어가듯, 한국에 오는 이주노동자들도 그만큼 늘어가고, 국경이라는 말은 무색해지는데 말이다.

그런 가운데 은 계속 관심을 환기할 거라 믿는다. 2001년 2월 이 제기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가 올해 전 사회적인 논쟁거리가 되면서 제도적 수용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듯이, 막막한 이주노동자 문제도 그렇게 해결돼갈 거라 믿어본다. 언론이 꾸준히 환기 작업을 하면서 좋은 방향으로 가도록 도와줘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주 노동자 인권보호를 위해 발벗고 나서진 못하지만,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지면으로 접할 때마다 흐뭇해진다. 각지에 있는 인권상담센터의 노력이나 공익 변호사 그룹 ‘공감’의 활동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과정일 것이다(519호 사람과 사람 ‘아름다운 변호사들 떴다’). 인권활동가, 이라는 언론매체, 그리고 이야기에 공감하는 독자들이 기사에서 만난다. 우리의 이런 상호작용이 언젠가 이주 노동자들의 겨울을 훈훈하게 만들어줄 거라 생각한다.

주제: “난 엄마처럼 살 거야!”/ 김계정·9기 독자편집위원

내 머릿속에 늘 잠재하여 나를 일깨우는 한마디,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마라”.

우리 어머니가 주문을 외듯 늘상 나에게 외치신 말씀이다. 어릴 땐 어머니가 왜 그러시는지 이해 못하고 짜증내기 일쑤였지만, 내가 여자라는 걸 깨달으면서 어머니의 이 한마디가 일생의 지표가 되어 내 삶의 방향을 밝히는 빛이 됐다. 전형적인 현모양처로서의 삶을 당신의 삶이라 생각하고 늘 편안하고 행복한 모습을 하셨던 어머니가 왜 그런 말을 던지셨는지는 내가 ‘아내’라는 이름으로,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뼛속 깊이 이해하게 됐다.

한 인간으로서의 당신 모습은 전혀 없으셨던 어머니.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 익숙하지만 당신 이름 석자는 너무 낯설었다. 그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가슴 아픈지는 내가 ‘엄마’가 되면서 비로소 느끼게 됐다.

난 내 어머니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에 가슴 아파 울고, 또 두 딸을 둔 어머니로서 우리 딸들이 겪어야 할 열등감과 좌절, 불평등을 떠올리며 울게 된다. 그렇기에 ‘딸들의 유쾌한 질주 - 여풍, 대학가에서 법조계까지’라는 538호 표지 제목만으로도 내 응어리진 마음 한켠이 풀린다. 표지의 여학생들이 활짝 웃는 모습에서 우리 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내 어머니의 한마디가 메아리친다.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마라”라고 말했던 우리 어머니와 똑같이 나도 우리 딸들에게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마라”라고 말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반성해본다. 여자로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구분지어놓고 잔소리로 우리 딸들을 키우고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난 희망한다. 내 어머니를 만나 “난 엄마처럼 살지 않았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내 딸들에게 “너는 엄마처럼 살아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를. 내 삶이 그렇게 만들어질 때 “난 엄마처럼 살 거야”라고 딸들이 메아리 보내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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