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자가 만난 대만인들…식민 지배 50년만에 영혼까지 빼앗겨
▣우서·타오위안(대만)=글·사진 스나미 게스케 프리랜서 기자
yorogadi@hotmail.com
“일본에 원한은 없다. 나는 일본 국민의 의무로 전쟁을 하러 갔으니까.” 대만 북부 타오위안의 원주민 마을에서 만난 로신 유라오(91)는 바른 일본어로 강력하게 말했다. 그는 일본군 군속으로 뉴기니 전쟁터에 나갔다 돌아왔다. 그의 이야기는 일본 할아버지들에게서 듣는 남방 전선의 이야기와 같았다. 일본령 대만에서 태어나 일본 군인으로서 나라를 위해 싸우고 돌아오니 나라는 중화민국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은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고향 일본으로부터의 ‘기민’이 아닐까. 한반도보다 15년이나 긴 식민 지배를 받은 대만에서 야스쿠니신사를 정점으로 하는 황국 사상은 어떻게 평가되고 있을까. 취재진과 함께 대만을 찾았다.
우서 사건, 원주민들의 마지막 봉기
대만인은 예로부터 섬 안에 살아온 10여 개의 원주민족과 대륙에서 이주해온 한족으로 구성된다. 1895년 대만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구미 열강에 대만 영유를 인정받기 위해 대만 근대화를 급속히 추진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웅장한 대만총독부를 건설해 거리를 예쁘게 정비하는 한편, 원주민의 땅과 문화를 빼앗고 학교를 만들어 일본어 교육을 진행했다. 가혹한 지배 속에서 대만 원주민들의 최대이자 마지막 항일 봉기인 우서(霧社)사건이 일어났다.
1930년, 대만 중앙부 산림지대의 타이알족이 사는 작은 마을 우서에서 원주민 지도자 모나루도가 인솔하는 타이알족이 일본인·대만인·원주민의 합동 운동회를 습격해 약 140명의 일본인을 살해했다. 일본 경찰과 일본군은 관여자들을 철저하게 죽여 진압했다. 일본군은 비행기에서 독가스탄을 떨어뜨려 성능을 실험했다고 한다. 1차 우서사건이다. 일본군은 진압작전 뒤 친일적 원주민과 봉기를 일으킨 반일적 원주민이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다시 1천 명 가까운 타이알족이 희생되고 살아남은 사람은 고작 300명뿐이었다. 이를 2차 우서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타이알족은 우서에서 차로 1시간쯤 떨어진 칭류(淸流) 마을로 강제이주됐다.
그 마을에 사는 여성 하보 루비(67)는 부족어로 우서사건 위령비에 기도한 뒤 “나는 하루코(春子) 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마을에서도 하루코로 불리고 있단다. 부족어로 무엇을 기원했냐고 일본어로 물으니 유창한 일본어로 “일본 친구가 평화를 가져와주었다고 기도했어요”라고 대답했다. 부모 세대에 심한 탄압을 받은 타이알족 여성도 일본 이름을 자칭하며 일본인을 환영해주었다. 필자의 당혹감은 깊어질 뿐이었다. 어떤 40대 대만 남성은 이렇게 말했다. “젊은 세대는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식민지 시대를 경험한 대만인은 많은 사람이 친일파예요. 대만은 일본 통치로 인해 근대화가 됐다고 감사하고 있죠.”
이러한 친일적 언동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일본 우익은 그들의 말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잘못되지 않았으며 태평양전쟁은 아시아를 구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하려는 정의의 전쟁이었다고 끊임없이 선전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반대하고 일본 정부의 성실한 사죄를 촉구하기 위해 5월6일 타이베이시 대만대학 사회과학원에서 대만·한국·일본 3개국의 100명가량이 ‘강제연행과 전시 성폭력 문제’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여기에서 많은 연구자와 피해자들이 한국·대만 출신 야스쿠니신사 합사 취하소송, 대만·중국의 군 위안부 문제, 중국인의 강제연행·강제노동 문제 등을 이야기했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다.
“우리는 군용견 다음 신분”
일본군에 징병된 경험이 있는 대만인 랴오티앤신은 “우리 대만 병사는 일본 군인, 일본 군속, 군마, 군용견의 다음 신분으로 명시돼 동포가 사는 중국 대륙의 전선에 보내졌다. 정말로 분했다. 나는 훈련소가 된 대만의 학교에서 폭탄을 가지고 탱크에 돌진하는 특공훈련을 받았다”고 말했다. “일본의 총리가 야스쿠니신사에 가는 것은 독일 대통령이 히틀러의 무덤을 참배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원주민 루만메이(82) 할머니는 일본군에 속아 위안부로 일하게 됐다. 중국 하이난도 위안소에서 임신 8개월 때까지 일한 뒤 대만에 돌아왔다. 사죄와 배상을 요구해 일본 재판소에 제소했지만 졌다. “지금도 슬퍼서 밤에 혼자 울 때도 있다. 어떤 일을 해서라도 일본에 사죄를 요구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죽고 싶지 않다.” 중국의 위안부 문제 전문가 이시다 요네코 오카야마대 명예교수는 “규모나 내용 면에서 아시아 각지에는 다양한 성폭력 피해자가 있다”고 말했다. “위안부 문제는 가장 드러나지 않고 존엄의 회복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는 도쿄에 ‘여자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지원자를 모아 해결을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대만 중앙연구원의 위안부 문제 전문가 주더란 연구원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 위안부에 대한 기술이 사라지고 아베 총리는 국가가 강제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시아와 일본의 생각이 왜 이렇게 다른지 모르겠다”며 “역사를 볼 때는 피해자의 관점이 중요하다. 일본인들이 일본의 관점에서만 일본 역사를 보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일본에서 참가한 재일화교 린보야오 중일교류촉진회 비서장은 일찍이 대만에서 장모를 일본에 초대했던 경험담을 얘기했다. 어디를 관광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장모는 “우선 황거(皇居·일왕이 사는 집)에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이를 두고 “대만인들의 일본을 찬미하는 마음이 생각보다 큰 데 놀랐다”고 말했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 50년 동안 대만 문화와 토지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까지 빼앗은 것인가.” 그는 “정말 무서운 일”이라며 곤혹스러워했다.
일본이 전후 처리를 제대로 안 했기 때문
대만은 “일본 국민으로서 기뻐하고 전장에 갔다”는 원주민 로신 유라오와 일본 제국주의를 멈추려고 투쟁하는 사람들이 섞인 복잡한 나라다. 이는 전후 복잡한 대만 정치사와도 연관돼 있겠지만, 일본이 전후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때문이 크다. 일본 정부는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기는커녕 전쟁 전으로 회귀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이 스스로 이 움직임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 한심하지만, 심포지엄처럼 아시아 여러 나라와 일본의 진보세력이 연대해 일본의 군국주의를 멈추려 하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
일본인 시무라 미야코는 1923년 사할린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평양전쟁 말기 중국인들을 홋카이도 광산으로 끌고 가 강제노동을 시켰던 기억을 평생의 고통으로 간직하고 있다. 시무라는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강제노동의 참상을 고발하는 수많은 그림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들고 이번 심포지엄에 참가했다.
전시 중 강제연행된 중국인의 노무관리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1945년 6월부터 홋카이도 이와나이의 광산에서 건설회사 ‘가시마구미’가 중국인을 동원해 광석을 씻는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중국어를 조금 알고 있어서 가시마에 중국인 노무자 관리 담당으로 취직했습니다. 중국인들의 일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삼태기를 메고 흙을 옮겼는데, 조금만 있으면 어깨가 붓고 가죽이 찢어져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휴일은 비오는 날뿐이었고, 식사는 하루 세 번씩 콩가루를 가다듬어 찐 만두 2개와 소금국이 전부였습니다.
중국인들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국민당군이나 공산당군뿐만이 아니라 일반 주민이나 농민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정부, 기업, 현지의 화북노공협회(華北勞工協會)등이 한 명당 얼마씩 가격을 계산해 연행했습니다. 즉, 노예 매매입니다. 200명이 칭다오에서 배에 실려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는데, 그 과정에서 4명, 이와나이에 도착하고 나서 1명이 영양실조 등으로 숨졌습니다. 그러나 노역이 시작된 지 2개월 만에 전쟁이 끝나 다른 강제노동 현장보다 좋았습니다. 12월에 모두 중국으로 송환됐습니다.
왜 강제연행·강제노동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까.
=나는 중국인 노무 담당자로서 8개월간 중국인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을 때린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내가 가시마라는 가해자의 쪽에 있었고 가시마에서 월급을 받아 밥을 먹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일흔부터 내 기억을 역사에 남기려고 강제연행 과정을 담은 수묵화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이런 역사가 있었다고 알리고 싶습니다. 가해자의 시점으로 그린 그림은 드물어 각지에서 화제가 됐고, 중국 각지의 박물관에도 전시되고 있습니다.
|
중국과 일본에는 잘 알려졌지만 한국인들은 거의 모르는 사건이 있다. 하나오카(花岡) 사건이다. 하나오카 사건은 전쟁 중 다수의 중국인들이 일본 광산에 강제로 끌려가 강제 노역에 시달린 사건으로, 가혹한 노동조건을 참지 못한 중국인들이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하나오카 사건과 그 처리 과정은 이번 심포지엄의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아치타 스네오(66) ‘하나오카 평화 기념회’ 부이사장을 만났다.
하나오카 사건이란.
=전쟁 중 국가의 정책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일본 광산 등으로 강제 연행됐습니다. 아키타현 하나오카초(지금의 오다테시)의 하나오카 광업소에서 하나오카강 개수사업을 하청받고 있던 건설회사 ‘가시마구미’가 1944년부터 986명의 중국인을 강제 연행했습니다. 가혹한 노동과 학대를 견디다 못한 중국인 노무자들이 1945년 6월30일에 일제히 봉기했지만 헌병대, 경찰, 현지 주민 등에게 진압돼 100명 이상이 살해됐습니다. 최종적으로는 강제 연행자 중 419명이 죽었습니다.
전시 중에 일본 국내 최대의 항일 폭동이라고 말해지는데.
=폭동이라 부를 정도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식량도 없고 가혹한 노동을 하고 있던 중국인들이 산에 도망치는 정도였습니다. 그 사건을 진압했던 헌병 생존자의 얘기를 들었는데, 헌병이 산을 둘러싸 올라가면 중국인들은 서 있을 힘도 없어 땅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왜 이 사건을 되돌아보는 활동을 하는지.
=오다테에서 태어나 자라 자연스럽게 하나오카 사건을 알게 됐습니다. 다섯 살 때 저희 집 근처에서 돼지 먹이를 찾아 먹고 있던 중국인이 잡혀서 나는 친구들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놀았습니다. 중국인 학살에는 현지 주민도 참가했습니다. 현지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활동 성과는.
=하나오카 사건 피해자들은 가시마 쪽에 사죄와 기념관 건설, 배상을 요구했고, 가시마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기념관을 만들기 위해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천만엔이 모여, 하나오카에 땅을 샀습니다. 내년에 중국인 생존자를 초대해 건설 개시를 알리는 테이프 컷을 하고 싶습니다. 일본에 있는 전쟁기념관들은 대부분 피해자의 시점에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해자의 시점에서 반전을 얘기할 거점을 만들고 싶습니다.
(*하나오카엔 조선인도 1천~2천 명이 있었다고 하지만 자세한 수는 알 수 없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출석 요구 3번 만에 나온 경호처장 “대통령 신분 걸맞은 수사해야”
“임시공휴일 27일 아닌 31일로” 정원오 구청장 제안에 누리꾼 갑론을박
고립되는 윤석열…경찰 1천명 총동원령, 경호처는 최대 700명
경호처 직원의 ‘SOS’ “춥고 불안, 빨리 끝나길…지휘부 발악”
25년 경호 공무원의 조언 “대통령 ‘개인’ 아닌 ‘공인’ 지키는 것”
또 튀려고요? [그림판]
“최전방 6명 제압하면 무너진다”…윤석열 체포 ‘장기전’ 시작
‘윤석열 체포 저지’ 박종준 경호처장 경찰 출석
돈 더 주고 대형항공사 비행기 타야 할까? [The 5]
윤석열 탄핵 찬성 64%, 반대 32%…국힘 34%, 민주 36% [갤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