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도 태평양전쟁 피해자 소송을 이끌어온 ‘노합사’ 사무국장 나오요시
▣ 도쿄=글·사진 황자혜 전문위원 jahyeh@hanmail.net
그동안 우리가 모르고 살아온 사실이 있다. 일본에서, 태평양전쟁 한국인 피해자 유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인다는 사실은 더 이상 한국인들의 관심을 불러모으지 못한다. 소식은 신문 사회면의 1단 기사로 찌그러들고, 우리는 재판이 있었던 사실조차 쉽게 잊는다. 한국 사회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도 재판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들의 끈기 있고 열정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스쿠니신사 한국인 합사 취하소송을 지원하는 활동을 펴온 ‘노합사’(NO 合祀)의 중심 멤버 야마모토 나오요시(42)를 만났다. 평범한 도쿄도 직원인 그를 지난한 소송투쟁으로 이끈 힘은 무엇이었을까.
승소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
한국에서는 일본의 전후보상 책임을 묻는 소송에 평범한 일본인들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 유가족 지원에 나선 시기와 배경이 궁금하다.
=1993년의 일이다. 우연히 전후보상과 관련된 책을 읽다가 일본강관(NKK) 가와사키시 공장에서 일했던 김경석씨의 재판 사실을 알게 돼 ‘김경석의 일본강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의 대표에게 연락해 참가한 것이 계기였다. 그때 고마자와대 경제학과 교수로, 전시 중 일본 기업의 강제연행을 연구하는 고쇼 다다시 교수를 만났다. 그는 옛 일본제철(현 신일본제철)의 내부자료를 가지고 연구 중이었는데, 전후에 강제연행된 이들에게 마땅히 지불돼야 할 돈이 미지불 상태이며 이를 당사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고쇼 교수는 이와테현의 가마이시 제철소가 함포사격을 당했던 45년 4월15일과 8월9일, 많은 한·일 노동자들이 희생됐다는 것을 알고 92년 이 자료들에 의거해 유족들에게 편지를 쓴 당사자다. 여기에 생존자인 재일동포 송병욱씨까지 가세하면서 “재판에 나서자”는 분위기가 고조됐다. 고쇼 교수가 내민 손을 잡은 95년 9월부터 많은 강제연행 관련 재판에 관계하게 됐다. 97년 신일본제철과 유족의 화해가 성사됐으나, 국가를 상대로 한 최고재판에서는 패소했다. 또 2000년과 2004년 ‘공탁금 반환소송’을 냈으나, ‘일·한 청구권 협정’ 이후 65년에 일본이 한국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킬 목적으로 만든 법률 144호에 의거해 ‘권리 없음’으로 인정돼 2006년과 올해 각각 패소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이희자씨를 비롯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관계자들과 돈독해졌다.
패소가 거듭되는 상황에서도 이 일을 하는 이유는?
=90년대에는 쓰고 나면 버려지는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개념이 전쟁 전과 하등 다를 바 없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일본 사회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지금은 사회 전체의 방식, 즉 강제연행만이 아니라 역사인식과 관련한 것을 일본인 스스로 결말을 짓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활동의 성과라면?
=패소를 거듭하는 싸움이지만,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진상이 밝혀지고 사회적인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 것이 중요한 성과다. 진상을 밝히고 상호 이해하는 과정이 없다면, 화해는 진전될 수 없다. ‘승소’라는 명확한 결과만큼 크고 중대한 성과다.
야스쿠니신사 강제 합사를 취하해달라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2001년 유족들이 제기한 첫 번째 소송이 2006년 도쿄지방재판소에서 패소했다. 당시 느낌이 어땠나?
=한마디로 “너무하다”였다. 정말이지 창피할 정도다. 국가의 대변자가 돼서는 안 될 최고 사법기관이 국가의 입장만을 거듭 반복하다니. 조금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국가 쪽에 붙어버린 판결이었으니 그저 “질렸다”는 말밖에 안 나왔다.
야스쿠니적 발상이 일본 사회에 통용돼
그래도 다시 소송 지원을 결심한 이유는?
=야스쿠니신사를 피고로 하는 것은 무리라는 변호사 쪽 의견과, 야스쿠니에 안치되지 않는 군인·군속 재판의 생존자들도 많아 야스쿠니만이 부각되는 소송이 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국가는 조사하고 통지만 할 뿐이다. 합사한 것은 야스쿠니다”라는 지난해의 판결에, 야스쿠니를 상대로 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지난해 8월 오사카에서 대만·일본 피해자의 소송을 낸 데 이어, 한국도 소송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단, 400명 이상의 원고단이 재판을 하는 것은 운영상으로도 버거워 생존자 한 분과 유족으로 11명의 대표단을 압축 구성했다.
소송의 전망은?
=물론 밝지(만은) 않다. 야스쿠니는 지방마다 호국신사를 두고 있는데 최근 70년대 사고로 죽은 자위대원의 기독교 신자인 부인이 합사에 반대하는 소송을 내어 1심에서 승소했으나 최고재판에서 졌다. “개인에게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추도할 자유가 있는 만큼, 신사도 사자를 모실 자유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한·일 간의 문제는 종교적 자유 차원과도 다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사적 사실이 엄연히 있고, 가해자와 함께 묻히는 것은 뭔가 일그러진 정황이다. 아울러 한국인에게 심리적·정신적인 피해를 입힌다. 재판상 ‘권리’로 인정받기까지는 대단히 힘들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야스쿠니신사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시켜야 한다. 야스쿠니적 발상이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본인이 많다. 야스쿠니신사는 국가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창씨개명된 이름으로 한국의 희생자가 야스쿠니에 합사되는 것에는 국가가 철저히 관여하고 있다.
소송 비용도 상당할 텐데, 어떻게 감당하는가?
=사실 이것은 일본에서, 일본 국민들에게서 지원을 받아 마땅한 일이다. 현재는 원고의 방일 비용을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지원해주지만, 재판 비용은 지원하는 곳이 없어 변호사 비용 이상의 자금을 마련하기가 버거운 현실이다. 처음에는 원고 분들을 일본으로 모시는 데만 20만~30만엔, 1년에 최소 100만엔이 들어, 여러 관련 단체에 속한 약 600~700명의 시민들로부터 받은 회비로 충당했다. 예를 들어 나는 10개 정도의 단체에 속해 있는데, 회비만 한 달에 수만엔을 낸다. 한국에 갈 때도 물론 자비를 들인다.
가족의 반대도 있을 법한데.
=물론 없다. 강제연행 소송운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과 결혼했다. 그래서 더 이 운동을 그만둘 수 없고, 주변에서도 그만두기 힘들겠다고들 한다. (웃음)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을 무지 좋아한다
소송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특별한 비결이라도?
=패소를 거듭해도 다시 힘을 얻는 곳은 역시 한국이다. 한국에서 원고 분들을 만나 뜨거운 밥 한 끼, 술 한 잔 드는 순간, 다시 도전할 용기가 솟는다. 한국 속담 중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무지 좋아한다. 소송의 시작 자체가 우리 목적의 반을 이룬 것이라고 믿으며 힘을 낸다.
그동안 재판 과정에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였나?
=신일본제철의 한국 피해자 유족들이 재판이 끝난 뒤 “앞으로도 계속 친구로서 관계를 갖자”고 말했을 때다. 전후보상의 목적은 피해자 구제만이 아닌 시민관계 개선의 과정이다. 이것이 최대 보람이자, 승소에만 집착하지 않고 지속해나갈 수 있는 이유다.
한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야스쿠니 문제는 한국 유족의 명예만이 아닌 일본의 역사청산 문제다. 누가 누구를 지원하는 것을 넘어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의지로, 재정 문제를 포함해 이뤄지는 한·일 연대의 노력은 큰 진전이다. 이번 캠페인의 중요성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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