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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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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캠페인] 할아버지, 저는 잠들 수가 없어요

등록 2006-06-01 00:00 수정 2020-05-03 04:24

죽는 순간까지 평택의 참화를 잊지 못한 이병철 할아버지를 보내며… 땅을 빼앗긴 노인들은 세상을 뜨고 주민들은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려

▣ 두시간 대추리 이주민 obbia@dreamwiz.com

대추리 1반은 대추리 네 개 반 중에서도 미군 부대 캠프 험프리스 철조망을 바로 등지고 있는 곳이다. 척박하고 가난한 동네라 주민들은 이곳을 ‘녹두밭 머리’라고 불렀다. 녹두밭 머리에서도 맨 끝집에 사시던 올해 일흔둘의 이병철 할아버지가 5월23일 오후 1시께 지병인 위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위암 판정을 받고 대수술을 하신 뒤 꼭 1년 만의 일이다.

그의 땅엔 철조망, 그의 집엔 초소가

할아버지는 5월4일 황새울 들판과 대추초등학교가 군대와 경찰에 의해 유린당할 때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집 밖으로 나와 당신의 눈으로 그날의 참화를 목격했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그로 인한 충격과 분노를 거두지 못했다. 오늘도 나는 평택 대추리에서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다. 벌써 3일째 밤새워 포클레인 삽날로 드넓은 논을 파헤치고 있는 공병부대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은 송탄의 한 장례식장에 싸늘한 주검으로 잠들어 계신 할아버지를 뵙고 온 생각을 하면 마음 둘 곳을 찾을 수 없다.

지난해 초 처음 뵙고 속 깊은 대화를 나눈 뒤로 할아버지는 객지에서 들어온 나를 친아들처럼 대해주셨다. 자주 그분 집에 드나들며 농부의 어려운 처지와 미군기지 확장 추진이 마을에 남긴 상처들을 알기 시작했다. 40대 중·후반 토박이 농부들인 미군기지확장반대 팽성대책위 임원들과 빈소에 조문하고 식탁에 둘러앉았다. 음식을 나누면서도 쓸쓸하고 외로운 마음만 가득하다.

할아버지는 이제 장지가 된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전국을 떠돌며 노동자로 살아오다가 41년 전 대추리로 이주해왔다. 그는 대추리에서 3천 평을 임대해 농사짓는 소작농으로 살아왔다. 미군기지 확장 강행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데다, 소작농의 약한 처지를 악용해 지주들이 경작 보상금마저 가로채는 횡포가 빈번해지면서 지난 2년여를 전전긍긍 속만 태웠다.

할아버지가 농사짓던 땅은 군대가 쳐놓은 철조망이 가로막아 들어갈 수 없다. 군대는 폭과 깊이가 3m를 넘는 웅덩이를 파 이중으로 원형 철조망을 치고 웅덩이 양쪽 밖에 다시 철조망을 쳤다. 웅덩이 안에는 물을 채워넣었다. 접근하면 익사할 수 있다는 경고 표지판도 세웠다. ‘웅덩이에 빠져 철조망에 몸이 얽히기라도 하면 정말 익사하고 말겠구나’ 하는 두려움에 주민들은 소름이 끼쳤다.

285만 평의 논을 가둬놓은 30km 가까운 철조망 선을 따라 곳곳에 군인들이 서너 명씩 경계를 서고 있다. 그도 모자라 감시카메라까지 설치했다. 경찰까지 가세해 감시카메라를 대추리와 도두리 나들목에 설치했다. 카메라는 통행하는 주민을 향해 있다. 경찰의 불심 검문을 거치지 않고는 마을로 들어올 수 없다.

할아버지가 12년 동안 살다 가신 집 앞에도 군대 철조망을 치고 초소를 지어 보초를 섰다. 그 앞에 다시 경찰 20여 명이 24시간 경계를 섰다. 집 앞 텃밭조차 함부로 들어갈 수 없게 됐다. 삶의 막바지, 거동조차 어려웠음에도 할아버지는 간간이 군인과 경찰을 향해 “나를 깔아뭉개고 내 집 앞을 지나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정부는 주민들이 반미단체의 사주로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선전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무지랭이로 취급했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미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문산인가 동두천인가 여학생들 탱크에 치어 죽이고, 아 이놈 새끼들 갈수록 난폭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는 거 아냐. 그놈 새끼들, 그 지랄하니까 일본놈들 독도 가지고 지랄허고….”

처음 대추리를 찾았던 지난해 2월 허리 구부러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혹한 속에 논길에 나서 있었다. 장작불을 때고 길 밥을 먹어가면서 ‘미군기지 확장반대’라고 쓰인 깃발과 나무 작대기를 들고 국방부의 토지 측량과 지장물 조사를 막고 있었다. “어떻게 일군 땅인데 그걸 빼앗아가느냐“며 눈물을 쏟다 돌아가신 분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지난해 겨울 석 달 동안 그렇게 대추리 주민 아홉 분이 세상을 등졌다. 역시 미군기지 확장 예정 터이자 대추리 이웃마을인 도두리까지 포함하면 최근까지 열다섯 분 넘게 돌아가셨다.

올 초는 도두리에서 40대 젊은 농사꾼이 세상을 등졌다. 그 역시 자기 땅 한 평 갖지 못한 소작농이었다. 그는 당뇨병을 앓고 있었지만, 소작으로만 생계를 유지할 수 없던 사정 때문에 농한기에도 일이 많았다. 그가 끝내 눈을 감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은 당장 삶의 터전을 잃게 되는 상황을 더는 견뎌내기 버거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떼부자가 된 줄 안댄다”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은 그렇게 병들어가고 있다. 심각한 우울증과 불안·불면증, 알콜 의존 같은 증세가 점차 퍼지고 있다. 사소한 일로 툭하면 화를 내기도 하고, 가족 간이나 주민들 사이에 크고 작은 말다툼이 조금씩 늘고 있다. 이런 증세를 두고 주민들은 ‘대추리·도두리병’에 걸렸다고 말한다. 할아버지도 세상을 뜨시기 직전 마을 공터에서 군대가 파헤쳐 검은 벌흙이 드러난 드넓은 들판을 다른 주민들과 함께 절망적으로 내려다보시곤 했다.

“밖에선 대추리 주민들이 보상을 굉장히 많이 받아가지고 떼부자가 된 줄 안댄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국방부를 비롯한 정부기관들의 왜곡 선전에 치를 떨었다. 그가 원한 건 그저 수십 년 살아온 삶의 터전에서 조용한 죽음을 맞고자 한 것뿐이다. 걸핏하면 대화를 들먹이는 정부는 어떤 금전 보상도 거부하고 있는 주민들을 예삿일로 모독했다.

할아버지에게는 애초부터 대화의 기회가 차단돼 있었다. 정부는 대추리를 전쟁터로 만들었고, 무력으로 땅을 강탈했다. 할아버지에게는 힘이 없었고, 법은 정부의 전유물이었다. 할아버지에겐 모든 사태가 불가항력이었고, 정부의 허락 없이 함부로 농사짓는 ‘불법자’라는 낙인까지 찍히게 됐다. 이 모든 일이 할아버지의 애간장을 태웠고, 그는 오열하는 병든 아내를 남겨두고 먼 길을 떠났다. 오늘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다.



아휴 여기서 죽어야 하는디

열아홉 살 동짓달에 시집와서 여기다 산소 자리도 사놨어

▣ 김양분(68)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163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논으로 가는 길을 막은 철조망은 감옥의 창살과도 같다. 살아 있는 땅을 놀릴 수 없어, 김양분 할머니는 밭에 고구마 심을 준비를 하고 있다.

비가 내일모레 온다니께, 비 오고 나서 심어야겄어. 저 물통을 하나 갖다놓고 심으면 실컷 심을 거 같애. 지금 딱 고구마 심을 때잖어. 한 200포 심으면 되겄더라니께. 고 옆에는 지킴이들이 열무 쭉쭉 심었더라구.


우리네 황새울에 마늘 심은 것도 얼마나 좋은 줄 알아. 농사지은 거 먹어야지. 경찰한테 마늘이라도 좀 캐다먹게 해달라고 했어. 심어놓고 캐다먹어야 할 거 아냐. 비행기 뜬 놈들한테 말을 하래. 여기서 젤 높은 놈 누구냐니께. 헬리콥터가 지나가면 말을 하래. 옘병할 놈들이 구덩이는 다 파놓고 이 지랄이여. 여기가 너희 땅이냐. 니들이 이렇게 서 있어도 우리 땅이라고. 우리는 돈 하나도 안 찾았응께 우리 땅이라고 그랬다니께.
난 저 물 건너 포승면에서 시집왔어. 포승면 신영리. 열아홉 살 동짓달에 시집왔어. 여기 옛날에 비만 와도 붕어가 하었어. 잡어다 막 먹었지. 붕어가 하었어. 어려서 열여섯 살에는 우리 아버지랑 배 타고 새우젓 절여가지고 여기 대추리에 팔러왔었어. 아버지가 우리 오빠는 안 싣고 다녀도 난 꼭 데리고 다녔어. 힘 좋다고. 여기 왔다 돌아가는데 한번은 돛이 부러져서 노를 저어도 아무 소용 없는겨. 바람이 철렁철렁 물놀이 쳐서 떠내려가는 거여. 가생이로 가야 하는디 이놈의 배가 섬으로, 저기 충남 섬으로 떠내려갔어. 거기서 하루 저녁 자고 왔지. 그렇게 여기 다니다가 울 아버지가 나 일루 시집보낸 겨. 중매해서 열하루 만에 온 거여. 울 엄니가 밤에 광목 삶아가지고 보냈지. 고상을 얼마나 하며 살았다고. 나 더부살이도 많이 했어. 더부살이를 몇십 년 했어. 우리 영감은 저기 부대 경비도 했어. 팔방남방 다 돌아댕기며 고생하고 살았는디 또 이렇게 고생하는 겨. 시방 여기서 살다 죽어야 하는데. 여기다 산소 자리도 사놨어. 저기 운봉에다가 산소 자리 다 사놨어. 아휴 여기서 죽고 그런 데로 가야 하는디. 이 지랄이니 속이 안 좋아. 밥 먹은 거 소화도 안 되고. 시방 집구석에 있어도 손에 일도 안 잡히고. 잠을 자야 하는데 잠도 안 오고. 잠 안 올 때는 미치지.

인터뷰·사진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진재연




힘내라, 솔부엉이도서관



82,947,913월
5월26일 현재 모금액 8294만7913원

솔부엉이도서관 기억하세요? 대추리 주민들은 지난해 여름 대추초등학교에 도서관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온 나라에서 많은 분들이 한권 두권 책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게 400권가량 책이 모였습니다. 대추리 아이들 예진이, 소이, 나연이는 도서관 지킴이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예쁘게 꾸며놓고 도서관 이용수칙을 만들어 붙이기도 했습니다. 조용히 책을 읽는 시간보다 웃고 떠드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도서관은 행복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는 주민들도 가끔씩 도서관에 들러 지친 마음을 쉬어가곤 했습니다. 포클레인을 앞세운 군대와 경찰과 용역이 대추리를 점령한 5월4일, 먼 길 학교 다니는 자식이 안쓰러워 주민들이 십시일반 쌀을 모아 만든 학교와 함께 도서관도 사라졌습니다. 주민들 마음도 학교의 잔해만큼 황량해졌습니다. 피멍 든 가슴 안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마을회관 뒷집에 솔부엉이도서관을 다시 열었습니다. 되살아난 도서관이 고립된 채 지쳐가는 마을도 되살려주기를 소망합니다.

김라경(5만원) 조은수(5만원) 양키!!(1만원) 전남대 사범대(10만원) 김선화(10만원) 안균섭·조경애(2만원) 임숙경(5만원) 박동성(1만원) 김상정(10만원) 대추리 사랑(5만원) 박숭(3만원) 허태혁(80만원) 이수환(5만원) 김도윤(1만원) 윤철기(40만원) 최임순(3만원) 이은덕(5만원) 공미영(5만원) 홍우열(5만원) 홍성미(3만원) 최신애(2만원) 류재철(3만원) 김승수(5만원) 정춘화(2만원) 단국 민중사회(15만원) 석진숙(5만원) 이순이(5만원) 안동 평통사(50만원) 서울대 역동반(30만원) 청년건대(5만원) 은종복(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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