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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백년의 냉대도 부족하더냐

등록 2003-08-13 00:00 수정 2020-05-02 04:23

해외 민주인사 귀국 보장을 위한 움직임 본격화…최종적인 해결의 열쇠는 대통령이 쥐고 있다

반백년 가까이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해외 민주인사들이 올 추석에는 성묘를 할 수 있을까.

송두율 독일 뮌스터대 교수, 곽동의 한통련 의장, 정경모 ‘씨알의 힘’ 대표, 고 윤이상씨 부인 이수자씨 등 조국으로부터 냉대를 받아온 이들에게도 어렴풋하나마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시민단체의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정부 당국자들 사이에서도 예전과는 다른 반응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도 태도 변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참여연대, 천주교 인권위 등 14개 사회단체는 8월7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공동대표 최병모 민변회장, 천정배 민주당 의원 등 28인)를 결성했다. 과거에도 몇몇 해외인사들의 귀국을 개별적으로 추진해오던 흐름은 있었으나, 이번에 이를 한데 묶어내 ‘일괄타결’을 시도하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범국민추진위원회가 이날 밝힌 해외 민주인사는 모두 64명이지만, 한통련 관계자 700여명, 유럽쪽 30여명, 미주쪽 10여명 등 모두 74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범국민추진위원회는 대통령·국정원장·법무부장관·행자부장관 등과의 면담을 추진하고, 해외 민주인사들을 ‘친북인사’로 분류한 공안당국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진상조사 및 법률적 대응을 해나갈 계획이다. 위원회는 이를 위해 국회조사단을 구성하고 대정부질문 등을 통한 국회 차원의 관심과 결의를 촉구할 방침이다.

이를 대하는 정부쪽 태도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국정원의 한 고위관계자는 “예전에는 해외인사들의 활동에서 위험 요소로 볼 만한 대목도 없지 않았으나, 요즘에는 이들 대부분이 고령화되고 국내 상황 변화로 동포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극도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북한도 이들을 대남전략 차원에서 활용하려는 노력을 더이상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의 귀국 추진은 ‘죽기 전 고향 땅을 밟아보겠다’는 소박한 차원의 것인 만큼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될 시기가 됐다”고 말했다.

국정원의 이런 변화 기류에는 고영구 원장의 존재가 적잖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 원장은 취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강만길 교수, 김승훈 신부, 이창복 의원, 홍근수 목사와 함께 ‘한통련 대책위’ 공동대표로 활동해왔기 때문이다. 고 원장은 일본에서 열린 한통련 관련 행사에도 참가하는 등 대책위 활동에 적극적 자세를 보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처지가 바뀌기는 했지만 자신이 요구해오던 내용을 관철시킬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있는 셈이다.

고 원장은 범국민추진위원회 결성 직후 공동대표인 최병모 민변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파악하는 등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박정삼 2차장 등 핵심간부들이 조만간 이 단체 대표들과 모임을 가질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법무부와 청와대도 긍정적 검토

해외 민주인사들의 귀국과 관련된 부서인 법무부와 행자부에 강금실 장관과 김두관 장관이 앉아 있는 것도 해외인사들로서는 호조건이다. 범국민추진위원회 한 관계자는 “두 장관이 해외 민주인사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해외 민주인사들의 귀국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해외 민주인사들로서 가장 고무적인 것은 청와대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7월11일 7대종단 종교지도자 8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백도웅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로부터 “국외에서 활동 중인 민주인사의 입국을 배려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가능한지 여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고 밝힘으로써 첫 단추는 꿰어진 셈이다.

이에 앞서 6월 노 대통령의 방일 기간 중에는 청와대의 한 수석급 인사가 곽동의 의장 등 한통련 간부 10여명을 만나 진상을 파악하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이 만남은 주일대사관쪽에서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보고서가 올라오는 바람에 무산되기는 했지만, 과거 청와대의 분위기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해외 민주인사 귀국을 추진하는 쪽에서는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 남궁진 정무수석 등 김대중 대통령의 최측근들을 두루 접촉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한통련 문제는 대통령이 판단할 문제”라며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3년 한통련의 전신인 한민통 결성을 위해 일본을 방문해 초대 의장직을 맡자마자 납치된 것과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전 대통령으로서는 한통련 문제가 곧 자신의 문제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다, 1980년 신군부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은 결정적인 이유가 한민통과 관련돼 있어 정치적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노무현 대통령은 한통련에 대한 일체의 부채 의식이 없기 때문에 훨씬 홀가분하게 이 문제에 대한 매듭을 지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 범국민추진위원회쪽의 기대이다.

하지만, 이런 유리한 조건들은 아직 분위기 차원일 뿐 당장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질지는 아직 미지수다.

우선 해외 민주인사들을 실무적으로 직접 담당하고 있는 국정원 대공수사국이 여전히 완강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송두율 교수의 경우 황장엽씨가 자신을 김철수란 가명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지목하자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 재판부로부터 “송 교수가 친북 성향의 사람이란 점이 입증될 뿐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됐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는 판결을 받았으나, 대공수사국은 여전히 “틀림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또 “한통련이 197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은 맞지만, 80년대 후반 이후 북한을 방문하는 등 친북활동을 주도해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입장에서 최소한 준법서약서를 쓰거나 또는 입국 후 조사를 받겠다는 약속을 해야 입국시킬 수 있다”는 것이 대공수사국쪽 입장이다.

국정원 대공수사국은 아직도 완강해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대공수사국의 이런 태도에 대해 “고영구 원장이나 서동만 기조실장 등 새로운 간부 진용에서는 해외 민주인사들에 대해 새로운 접근법을 주문하고 있으나, 대공수사국이 워낙 원칙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대공수사국은 돈이나 이권과는 거리가 먼 부서로서 사명감 하나로 일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국정원 안에서 가장 발언권이 센 곳 중 하나이다. 국정원 안에서 의견일치를 보는 데는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또 법무부가 최근 준법서약서 폐지 결정을 내려 법조계 안팎에서 ‘인권정책의 일보 전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해외 민주인사들에 대해서는 계속 준법서약서를 받을 방침인 것도 걸림돌이다.

이에 따라 결국 해외 민주인사 문제는 정치적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범국민추진위원회쪽의 시각이다. 국정원 관계자도 “비록 지금은 대공수사국이 반대하고 있지만, 사회적 여론 형성과 더불어 최고 통치권자의 결단이 있을 경우 이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 최종적인 해결의 열쇠는 노 대통령이 쥐고 있음을 밝혔다.

범국민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임종인 변호사는 “노 대통령은 1987년 6월항쟁의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얘기했다. 그때의 민주화 운동 관련 인사들에게는 명예회복과 보상이 따랐다. 일부는 국회로, 청와대로, 정부로 들어갔다. 그러나 해외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민주화운동을 같이 했던 동지들에 대해서 침묵한다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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