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디스토피아를 보는 것 같다. 여당 전당대회는 폭력으로 얼룩졌다. 극우 유튜버들이 국민의힘 전당대회 행사장에 난입해 특정 후보를 공격하다 주먹다짐이 벌어진 것이다. 일각에선 이 사태를 과거 ‘용팔이 사건’에 비유했다.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을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폭력배들이 난입한 이 사건은 나중에 배후에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권력 핵심부의 의지가 동력이었던 거다. 반면 최근 난투극의 동력은 유튜버의 극단적 행위에 대리만족을 얻는 지지자들이다. 1987년과 2024년, 더 나쁜 건 어느 쪽일까?
물론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 비생산적 이전투구가 좋은 ‘땔감’이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반성하고 자중해야 한다. 그러나 난투극이 벌어진 다음날인 2024년 7월16일에도 여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자성은커녕 역시나 남 탓에만 몰두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립이 전당대회가 끝나고 나서도 수습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을 상기하게 된다는 지적이 그렇다. 당시 형성된 친이(친이명박계) 대 친박(친박근혜계) 구도는 이후 약 10년간 보수정치를 지배했다. 이 갈등은 정치적 영역을 넘는 문제로도 번졌는데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비케이(BBK), 도곡동 땅, 다스 논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실세설 등 서로가 서로를 향해 제기한 의혹이 나중에 사법리스크로 되돌아왔다는 점이 그렇다.
이번엔 어떤가? 김건희 여사 문자메시지를 둘러싼 공방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댓글팀’ 공방을 예로 들어보자. 만일 김건희 여사 등 권력 핵심부가 여론에 영향을 미칠 의향으로 실제 ‘댓글팀’을 운영한 거라면 수사와 단죄가 필요한 사안이다. 논란이 커지자 친윤계(친윤석열계) 장예찬 전 청년최고위원은 ‘한동훈 여론조성팀’의 존재를 폭로하며 반격에 나섰다. 평소 법적 대응 카드를 애용해온 한동훈 후보는 “불법이 있으면 본인(장예찬 전 최고위원)이 자수하면 된다”는 정도의 반박으로 퉁치는 분위기다. 이것으로는 당연히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으니,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안 나올 수 없다.
한동훈 후보가 나경원 후보의 과거 ‘공소 취소 청탁’을 언급한 것도 비슷한 느낌이다. 7월17일 시비에스(CBS) 라디오를 통해 진행된 방송 토론에서 나경원 후보를 향해 “본인의 패스트트랙 사건 공소 취소해달라고 부탁하신 적 있으시지 않나”라고 한 건데, 의도가 뭐든 언론은 이를 ‘폭로’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역시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당장 수사기관이 움직일 것 같지는 않다.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을 다루는 태도를 보면 그렇다. 최근 김건희 여사 쪽은 언론 대응을 활발히 하고 있는데, 검찰 조사가 임박했다는 신호로 느껴진다. 문제는 조사 방식이다. 검찰 쪽에서 소환을 원하지만, 김건희 여사 쪽의 최근 대응은 여기에 격렬히 저항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김건희 여사의 최측근인 유아무개 행정관은 검찰 조사에서 당시 김건희 여사가 최재영 목사에게 받은 가방을 돌려주라고 지시했지만 자신이 이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게 맞는다면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에서 받은 가방이 왜 관저 창고로 이동했는지 등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김건희 여사 쪽은 7월16일 추가 해명을 내놨다. “‘바로 돌려주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으니 기분 나쁘지 않도록 추후 돌려주라’고 지시했다”는 거다. 또 김건희 여사 쪽은 명품백의 포장 상태에 대해서도 “포장을 풀어보긴 했으나 반환하기 위하여 그대로 다시 포장하여 가지고 있다”고 했다. 가방의 포장 상태를 김건희 여사 쪽이 직접 거론한 것은 처음이다.
김건희 여사 쪽의 대응은 여론보다는 법적 논리에 포인트가 맞춰져 있다는 인상이다. 명품백에 대한 영득 의사는 처음부터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아랫사람의 실책에 의한 것이라는 거다. 명품백의 포장 상태를 확인한 것 역시 검찰이 제출을 요구하기 때문인 걸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면 윤석열 대통령은 왜 “박절하지 못해 돌려주지 못하고 받았다”고 했는지, 돌려주면 ‘국고 횡령’이라던 ‘찐윤’ 이철규 의원 등의 주장은 어떻게 되는지, 명품백을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대통령의 청탁금지법상 신고 의무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문다. 이러니 사후에 미봉적으로 구성된 설명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거다. 그러나 뻔한 설명에도 검찰은 서면 또는 방문 조사 등으로 장단을 맞춰줄 기세다.
권력 앞에 약한 모습이 되는 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역시 마찬가지인 듯하다. 도이치모터스 2차 주가 조작 사건의 ‘컨트롤타워’로 지목된 이종호 전 블랙펄인베스트 대표의 발언이 담긴 녹음 파일 관련 보도를 보면, 강제수사가 긴급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채 상병 순직 사건 관련 임성근 전 사단장의 구명 로비 등에 부적절한 개입을 하는 등의 행위와 더불어 권력 핵심부가 아니면 알기 어려운 정보를 미리 취득한 게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공익신고자 조사에 투입된 공수처 검사 일부는 과거 이종호 전 대표를 변호했던 이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돼 뒤늦게 회피 신청을 했다. 휴대전화 확보 등 강제수사가 이뤄질 기미는 없고 이종호 전 대표는 자신을 ‘허풍쟁이’로 규정하는 언론 대응으로 적극 나서고 있는데, 과연 수사 의지가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최근 여당 내 친윤 중진으로 총대를 메고 나서기로 한 듯한 권성동 의원은 이 문제를 ‘야당발 제보 공작’으로 규정했다. 이전에 채 상병 사건이 특검 사안임을 인정한 한동훈 후보는 CBS 라디오 방송토론에서 채 상병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을 ‘박정훈 대령의 월권행위에 대한 시정 지시’로 표현한 원희룡, 윤상현 후보 등의 발언에 대해 “100% 공감한다”고 했다.
이 정도 수준의 의혹이 제기됐는데 아무것도 내놓지 않겠다는 식의 대응으로 일관하면서, 자기들끼리 당권 경쟁을 하면서는 수사 대상이 돼도 상관없다는 듯 행동하는 이런 정권은 생전 처음이다. 법치를 가볍게 보는 게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은 자기들이 집권할 때는 전임 정권의 ‘법치 훼손’을 명분 삼았다. 정권의 힘이 떨어질 때 수사기관이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면, 같은 역사가 두 번 반복될 수 있겠다는 예감마저 든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소극으로? 이게 디스토피아가 아니면 무엇일까.
김민하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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