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대 총선, 여성은 세 번 사라졌다. 숫자가 줄고, 인물이 없어졌고, 정책이 실종됐다. 이 세 영역에서 모두 전례 없이 퇴행이 일어나고 있다. 먼저 사라진 숫자부터 보자. 2020년 제21대 국회의 여성의원은 57명, 19%로 역대 최대 숫자를 기록한다. 다음 총선에서는 당연히 앞자리가 바뀔 거라고 기대했지만 전망은 어둡다. 총 699명의 후보 중 여성은 99명으로 14%에 불과하다. 공직선거법에 지역구 후보 추천시 전체 30%를 여성으로 추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조항은 이번에도 말뿐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이 조항을 지킨 정당은 녹색정의당(41.18%)뿐으로, 원내 1당과 2당인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각각 16.67%, 11.81%로 10%대에 머물렀다.
문제는 숫자만이 아니다. 제22대 국회의 성평등 정치를 이끌어나갈 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2024년 3월27일 여성주권자행동에서 주최한 총선 정책 토론회에서 제22대 총선의 젠더 정치를 분석한 한림대 신경아 교수(사회학)는 이런 상황을 두고 “성평등 정치의 구현자가 실종됐다”고 분석한다. 제21대 국회에서 성평등 입법을 주도한 권인숙, 정춘숙 의원과 민주당 지도부의 잇따른 성비위를 당내에서 비판했던 박성민, 권지웅, 황두영, 박지현 등 청년 정치인들은 모두 경선에서 떨어졌다.
전직 여성가족부 장관이었던 진선미와 대표적인 여성계 출신으로 성평등 관련 입법을 이끌어온 남인순이 있지만, 이들은 고인이 된 박원순 전 시장과 관련해 ‘피해호소인’이라는 명칭을 내부에서 처음 제안한 것으로 알려지며 이후 성평등 의제와 관련해서 사실상 발언권을 잃어버린(혹은 스스로 입을 다문) 상태다.
국민의힘은 ‘안티페미니즘’이 당론이라 인물의 면면을 지적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성 국회의원이 오히려 앞장서서 성평등 의제를 묵살하고 부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보수 진영에 속한 이상 역차별을 주장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증오를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편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세우는 데 이득이 되리라는 계산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황보승희 의원의 행보를 보자. 황보 의원은 당선 직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여성운동과 성평등 관련 글을 모두 비공개로 돌렸다. 이후 국민의힘 내부의 대표적 안티페미니즘 의견그룹으로 묶이는 하태경, 이준석 등과 함께 활동하며 여성공천할당제를 반대하는 등 성평등 정치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길을 걸었다. 제22대 총선에서의 변신은 더욱 화려하다. 전광훈 목사가 주도하는 자유통일당에 입당해 비례 1번으로 공천장을 받았다. ‘그’ 전광훈 목사가 맞는다. 2005년 “우리 교회 집사님들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빤스 벗으라면 다 벗어”라는 말로 유명해진 그 전광훈 말이다.
국민의힘 의원으로는 이례적으로 여성가족부 강화라는 의견을 가졌던 윤희숙은 여성가족부를 양성평등가족부로 개편하고 장관을 부총리급으로 격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당론이 안티페미니즘으로 기운 다음부터는 그런 주장을 더는 하지 않는다. 민주당에서는 구현자가 필요하지만 보이지 않고, 국민의힘에서는 당 전체의 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구현자가 나올 가능성은 없다.
인물로만 봤을 때 그래도 희망이 전혀 없지는 않다. 더불어민주연합 비례 6번 용혜인이나 15번 손솔, 17번 이주희 등 이른바 ‘진보정당’ 출신은 성평등을 주요 당령으로 채택한 곳의 후보들이고, 조국혁신당 비례 1번 박은정 후보는 검사 재직 시절부터 오랫동안 젠더폭력 관련한 법정책 분야에서 활약한 전문가다. 국민의힘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비례명부에서 눈에 띄는 인물은 9번 김민전 후보와 15번 김예지 후보다.
정치학자 김민전 후보는 세계 121위 수준의 여성 국회의원 수를 가진 한국에서 여성할당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남성패권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라 강조했다. 하지만 지금의 적대적 정치환경에서 후보 개인의 신념만으로 당론이라는 장벽을 돌파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불어민주연합에 참여한 진보정당 출신의 어떤 후보도 임태훈씨를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이유로 공천 배제한 것에 공개적으로 의견을 내지 않았다. 이 침묵이 전략적 유연성이 될지, 아니면 민주당이 허락한 범위에서만 운신하는 종속적 위성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적 조건이 될지는 아직 예단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후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성평등 의제와 관련해 정책 실종은 물론이거니와 존재하는 단어와 정책마저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중이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한국에서는 변질했기 때문에 쓰지 않겠다고 밝히며 젠더 불평등 문제에 관심은 있으나 아직 관련 정책은 없다고 말했다. 정권심판이라는 최우선 과제에 다른 의제가 어떻게 삭제되거나 밀리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지금까지 정책 분야에서 제기된 유일한 젠더 이슈는 비동의강간죄다. 유엔과 국제인권기구에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인권문제 개선 권고사항으로 강간죄 규정이 폭행 협박에서 비동의로 변화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국제사회의 압력과 국민의식의 변화로 제20대 국회에서 비동의강간죄는 무려 열 번에 걸쳐 발의됐다. 하지만 제21대 국회에서 이른바 보수정당은 완전히 빠졌다. 발의 시도 자체도 제21대에는 세 번으로 크게 줄었다.
문제는 국민의힘만 철수한 게 아니라 민주당도 함께 발을 뺀다는 데 있다. 민주당은 대선 공약에서 슬쩍 뺐던 비동의강간죄를 제22대 총선 공약집에 넣었다가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비동의강간죄로 인해 억울한 가해자가 생길 수 있다며 총공세를 하자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실무적 착오”였다며 철회했다. 김민석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상황실장은 “비동의강간죄는 장기과제로 추진하되 당론으로 확정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다음 국회에서 당론으로 확정하지도 않은 비동의강간죄를 장기과제로 추진할 만한 성평등의 구현자 역할을 할 인물이 없는 상태인 것을 고려하면, 다음 회기에서 비동의강간죄는 입법은커녕 발의 자체도 어려워진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전에 민주당은 정의당 등 진보정당의 정책을 가장 먼저 베껴가는 ‘패스트팔로어’였다. 그러나 이제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서로를 따라간다. 위성정당만 해도 국민의힘이 만들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않냐며 따라갔다. 이럴 때만은 서로에게 아주 충실한 알리바이가 돼준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정치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에 선거는 점점 더 ‘잘 통제된 스펙터클’로서의 기능을 가진다며 쇼비즈니스로서 정치는 대중을 유권자가 아니라 소비자로 만든다고 진단한다. 쇼비즈니스로서 정치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의 하나는, 각 정당의 정책들이 서로 구분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비슷해지는지 여부다. 예전의 민주당은 정의당 등 진보정당의 정책을 따라왔지만 2012년 이후부터 국민의힘과 서로 정책 교환을 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유사해졌다. 이제 민주당은 그 어느 때보다 ‘보수적’인 정당이 됐다. 역대 가장 ‘진보적인’ 세대라고 평가되는 40·50세대는 경제적으로 보수화된 지 오래다. 그리고 그 뒤에 깔린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안티페미니즘이다. 이번에 예비후보 경선을 경험한 몇몇 후보에게 소회를 물으니 이런 답을 줬다. “안티페미 유튜버의 영향력이 너무 세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서로를 성인지감수성이 없다고 공격하는 동시에, 서로를 갈라치기 정치의 주범으로 지목한다. ‘혐관’(혐오 관계의 줄임)의 서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두텁게 쌓여간다. 서로의 말투를 조롱하면서 베끼고, 누가 더 상대방의 속을 제대로 긁어놓았는지 누가 더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무시했는지 등 놀라울 정도로 유치한 말싸움이 매일매일 갱신돼 뉴스를 잡아먹는다.
유일한 농민 대표인 녹색정의당의 김옥임 후보는 농민들과 함께 대파를 다듬으며 점점 예측이 어려워지는 기후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농업정책을 이야기하지만 뉴스에서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 대신 ‘875원 대파’를 찾는 챌린지가 놀이처럼 퍼져나간다. 이런 것이 정말로 정치인가? 정당이 해야 할 일은 공중의 연대, 대화, 연결, 합의 이런 것들이다. 검투장으로서의 선거가 남긴 것은 검투사로서의 정치인이다. 적대적 공생관계가 고착될수록 의회에서는 정당의 의지를 외부에 과시하듯 내보이는 것 이상을 하지 못하고 당내의 다른 의견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능력도 점차 떨어진다.
기후위기, 양극화 위기, 저출생 위기는 지금 우리가 사는 방식 자체를 변경해야만 한다고 경고한다. 그 어느 때보다 정치가 필요한 순간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건 검투장의 스펙터클과 복수의 카타르시스다. 이때 가장 손쉬운 희생양이 되는 건 사회의 비주류, 몫이 없는 인간들이다. 해야 할 일이 많은 시기에, 가장 무능한 국회를 또다시 보게 될까봐 두렵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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