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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말할 때 정태인은 빛났다

심상정 의원, 벗이자 동지였던 진보적 경제학자 정태인의 삶을 회고하다
등록 2022-10-29 02:53 수정 2022-10-29 09:21
2016년 5월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정의당 정의구현정책단 회의에 참석한 정태인 정책단장(오른쪽)과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 정 전 비서관은 이외에도 2007년 정의당 대선 경선 때 심상정 캠프의 정책단장, 2019년 정의당 그린뉴딜위원회 위원 등 정의당의 각종 직책을 맡았다. 연합뉴스

2016년 5월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정의당 정의구현정책단 회의에 참석한 정태인 정책단장(오른쪽)과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 정 전 비서관은 이외에도 2007년 정의당 대선 경선 때 심상정 캠프의 정책단장, 2019년 정의당 그린뉴딜위원회 위원 등 정의당의 각종 직책을 맡았다. 연합뉴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을 지낸 정태인씨가 2022년 10월21일 경기도 용인의 한 호스피스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 고인은 2021년 7월 초 쓰러진 뒤 폐암 4기 진단을 받았고, 이후 뇌종양으로 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해왔다. 그는 청와대에 있을 때도 뚜렷한 진보 성향으로 종합부동산세(종부세) 도입을 지지했으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추진에 강력히 반대했다. 청와대에서 나온 뒤로는 독립연구자로 활동했다. 고인의 친구이자 동지인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추모글을 <한겨레21>에 보내왔다. _편집자

내가 정태인을 처음 만난 것은 한-미 FTA 반대 여론이 무르익던 2006년 7월께였다. 정태인과는 대학 동기였지만 이름만 알았지 그때까지 엮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한-미 FTA의 위험성에 대해 열변을 쏟아냈다. 얼마 전까지 대통령의 경제비서관을 지낸 사람의 격정 어린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한참이나 ‘FTA 반대’에 대해 공모한 뒤 일어서려는 순간, 그가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심 의원은 대통령 할 생각 없어요?”

느닷없는 그의 한 방에 갑자기 머리가 하얘진 나는 “원래 그렇게 농담을 잘하세요?”라고 말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우리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한-미 FTA였다. 이후 정태인은 나의 경제 교사이자 애틋한 친구가 됐고, 진보정치의 정책을 지원하면서 진보정당의 든든한 동지가 됐다.

‘생태 복지국가’의 비전

2007년 치른 민주노동당 대선 경선에서 정태인은 후보 캠프에 합류했다. 심상정의 비전과 정책을 기획하고 전 과정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당시 권영길-노회찬의 대결로 전망되던 양강구도를 깨고 당내 경선에 흥행을 불러일으키며 내가 2위로 올라섰던 일련의 과정에는 정태인의 역할이 컸다.

정태인의 합류는 캠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의 넓은 지적 세계는 경이로웠고 청와대 재직 경험에서 빚어진 비전과 정책은 탁월했다. 정태인은 “민주노동당은 집권 의지가 없다”며 ‘비전 경쟁’에 경선의 의미를 두던 나의 소극적 태도를 망치처럼 두드려댔다.

그때 정태인이 제안한 비전은 바로 ‘생태복지국가’였다. 처음 그의 제안을 받고 난감해하던 정책팀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만 해도 ‘생태’에 대해 준비되지 않았던 나는 정치인은 국민보다 반발자국만 앞서가야 한다는 궁색한 이유를 댔고, 결국 우리는 대표 슬로건을 ‘가난한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로 정했다.

그러나 경제 비전은 정태인이 제안한 ‘세 박자 경제론’을 채택했다. ‘국내 서민경제론-한반도 평화 경제론-동아시아 호혜 경제론’으로 구성된 명확한 국가경제 비전이었다. 진보 진영은 경제 대안이 없다던 세간의 문제 제기에 대한 반론이었다. 당시에 민심의 전도사인 택시 기사들이 뽑은 가장 기대되는 공약 2위에 오를 만큼 파급력이 컸다.

2007년 대선을 함께 치르면서 정태인이 많이 아프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아픔을 야기한 일련의 과정을 잘 알지 못한다. 깊이 물어본 적도, 그가 말한 적도 없다. 다만 그 아픔의 근원은 시시비비보다는 관계에서 비롯된 좌절과 깊은 고독이었을 거라 짐작할 뿐이다. 늘 술을 들이붓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약을 한 줌씩 털어 넣어도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다고 했다. 술과 니코틴으로 자신을 달래며 안간힘을 쓰는 그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늘 약자 곁에 선 ‘남의 편’

어느 날부터 새벽마다 정태인의 전화가 걸려왔다. 새벽 네다섯 시께 걸려온 전화의 의미는 그가 술을 털어넣고 우울증약을 먹었음에도 그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걸 뜻했다. 나는 휴대전화를 침대 머리맡에 두고 벨이 두 번 울리기 전에 받았다. 30분가량의 음주 강독이 이어졌다. 마리아나 마추카토, 엘리너 오스트롬, 로버트 라이시, 허먼 데일리 등 수많은 저자가 거명됐다. 그의 새벽 전화는 1년 가까이 이어졌다.

정태인을 지키고 싶었다. 당시 나는 원외에 있던 시절이다. 잠귀도 밝았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지 못하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새벽마다 외간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 괴이한 상황이었지만, 우리 남편은 언제나 그랬듯이 묻지 않았고 스스로 맥락을 깨달아갔다. 그때부터 남편 이승배씨도 정태인을 사랑하게 됐다.

나중에 정태인의 부인 차정인 여사와 대화하면서 그때가 정태인의 생에서 가장 위태로운 시기였음을 알았다. 나에겐 늘 버거운 친구였지만 순수한 영혼과 명민한 두뇌를 가진 그가 아깝고 그의 고통이 애처로웠다.

정태인은 탁발승 같은 삶을 살았다. 정태인의 말버릇은 “귀찮다”였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것을 귀찮아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으나 그는 안정적이고 돋보일 수 있는 여러 제안을 “귀찮아” 한마디로 일축했다. 반면 지적인 열정은 날이 갈수록 뜨거워졌고, 이름 없는 수많은 약자 편에 밀착했다.

그가 반짝이던 순간이 눈에 어른거린다. 그는 과감한 변화를 논하는 자리에서 빛났고, 청년들과 어울릴 때 가장 명랑했으며, 미래를 향한 논쟁에서는 거침없이 날카로웠다. 인터넷방송 <칼라티브이(TV)>로 광화문을 휘젓던 시절, 그리고 종종 가졌던 청년들과의 강연·술자리에서 그는 행복해했다.

동시에 정태인은 부지런히 미안해했다. 원래 사사로운 이야기를 잘 안 하는 사람이지만, 부인과 두 딸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화가인 차정인 여사가 얼마나 유능하고 포용적인 사람인지, 부족한 아빠 노릇에도 스스로 길을 개척해나가는 두 딸이 장하다고 했다. 차정인 여사가 원망한 것처럼 항상 ‘남의 편’이었던 자신의 삶이었기에 늘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깊이 간직한 것으로 생각한다.

탁발승 같은 삶을 존경했다

늘 허덕여온 심상정과 한 발 떨어져서 혜안으로 나를 안내하고 뒷심으로 성원해준 사람이 바로 정태인이었다. 그 누구보다 진보정치가 집권하기를 열망하고 염원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던 사람이다.

변화된 세상의 결실을 미처 보여주지 못한 채 그를 떠나보내게 됐다. 많이 감사하고 많이 미안하고 많이 서럽다. 그가 광활한 지적 세계에서 자유로운 열정으로 쏟아내는 아이디어를 받아내는 일은 늘 벅찼으나 그의 탁발승 같은 삶을 존경했고 그의 순수함과 정직함을 사랑했다. 이제 못다 한 이야기는 바람과 이슬과 별빛으로 나누리니. 사랑하는 나의 친구, 동지, 정태인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당신의 동지이자 영원한 벗, 심상정이

심상정 정의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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