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짱 도루묵.’
이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씁쓸한 입맛이 가시지 않는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다양한 목소리가 국회를 채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거대양당이 과다 대표하는 국회는 바뀌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한국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선거법 논의 과정을 ‘밀착 마크’ 하며 무수히 많은 기사를 썼지만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막무가내로 ‘비례위성정당’을 만들지 ‘1도’ 예상하지 못했다. 다 말짱 도루묵(아무 소득이 없는 헛수고)이다. 제21대 국회의원선거를 지켜보는 게 힘들다.
매일 마주친 의원들은 50~60대, 남성, 법조인
지난해 10월 초까지 <한겨레> 정치팀 소속으로 20대 국회를 출입했다. 국회 출입 초기인 ‘말진’ 기자(정치팀 막내) 시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거대양당의 거대한 힘이었다. 대한민국 입법부는 민주당과 통합당이 실질적으로 좌우한다. 거대양당이 지닌 힘의 원천은 근본적으로 의석수에서 나온다. 좀더 현미경을 대고 보면,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기까지 거쳐야 하는 상임위원회 소위원회, 상임위 전체회의,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 본회의 등 주요 포인트마다 회의 안건과 일정을 정하는 위원장, 간사, 국회의장 등 핵심 보직은 거대양당이 대부분 나눠갖고 있다. 또 선거법 같은 주요 법안은 교섭단체 원내대표 간 협상이 좌우한다. 이 또한 거대양당이 좌지우지한다.
그런데 거대양당의 힘은 국민이 위임(투표)한 대로 배분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역대 선거 결과를 보면 거대양당의 득표율과 실제 차지한 의석비율에 차이가 난다. 제20대 국회의원선거 결과를 보면, 각 정당의 의석 점유율은 더불어민주당 41.0%(123석), 새누리당(현 미래통합당) 40.67%(122석), 국민의당 12.67%(38석), 정의당 2.0%(6석)였다. 하지만 정당득표율로 추정한 의석수(괄호 안)는 더불어민주당 25.54%(76석), 새누리당 33.5%(100석), 국민의당 26.74%(80석), 정의당 7.23%(21석)였다. 거대양당인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각각 22석, 47석이 과다 대표된 반면, 소수정당인 국민의당과 정의당은 과소 대표됐다. 거대양당의 힘의 원천은 국민의 권력 위임인데 이를 담당하는 선거제도가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지 못해 ‘불공정한’ 의석 배분이 이뤄진 것이다.
매일 국회에서 마주친 의원들은 대체로 50~60대, 남성, 정당인·법조인 출신이었다. 실제 통계를 봐도 20대 국회의원 중 50~60대가 86%, 남성이 83%로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직업도 정당인(28%)과 법조인(15%)이 43%일 정도로 국회의원 구성은 획일적이다. 불공정한 선거제도의 문제는 ‘다양성’의 부재와도 직결된다. 거대양당은 ‘지역구 경쟁력’이라는 잣대로 50~60대 남성 위주로 공천한다. 최다 득표자 1명만 뽑는 소선거구 위주 선거제도에서 여성, 청년, 자영업자, 농민, 장애인, 이주민 등 소수자가 설 자리는 없다.
왜 우리가 ‘사표’ 방지를 고민해야 하나
지난해 3월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원조’인 독일 의회를 들여다보기 위해 현지 취재를 다녀왔다. 당시 만난 집권여당인 기독교민주연합(CDU)의 3선 의원인 파트리크 젠스부르크(49) 의원은 거대정당 소속임에도 다양성을 명분으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지지했다. “지역구 선거에서는 30~40%대의 득표력을 가진 거대양당만 살고, 10~20%대 득표를 하는 소수정당은 죽습니다. 거대양당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시민들의 다종다양한 요구를 의회에서 받아안는 데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적합한 그릇입니다.”
독일에서 만난 유권자 토마스 클레어(48)가 “지역구에서는 거대양당인 기민련이나 사회민주당(SPD)이 당선될 게 뻔하지만, 나는 자신 있게 녹색당 후보에게 투표한다”고 말할 때는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선거 때 우리 지역구에서 내가 지지하는 정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생각하며, 내 표가 사표가 되지 않도록 늘 머리를 쥐어짰는 데 비해, 정당득표율로 의석이 배분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클레어에게 자유로움을 선사하는 거로 보였기 때문이다.
좋은 취지의 제도를 도입했는데 왜 모든 게 도루묵이 된 걸까? 취재수첩을 다시 넘기며 복기해봤다. 선거제 개혁은 2018년 말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의 단식, 2019년 4월 ‘동물국회’ 몸싸움 끝에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국회에서의 지난한 협상 과정 등 지난해 12월27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기까지 진통을 거듭했다. 가장 큰 이유는 원내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이 거세게 저항한 탓이다. 통합당은 ‘비례대표 폐지, 의석수 270석(현재는 300석)으로 10% 감축’이라는 개혁에 역행하는 당론을 들고나오는 등 20대 국회 선거제 개혁 논의 과정 내내 시간끌기용 ‘침대축구’로 일관했다.
미래통합당 빠진 합의가 원인
통합당의 반대라는 상수 외에 또 하나의 원인은 집권여당인 민주당 안에서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는 점이다. 민주당 의원들은 선거제 개혁에 대해 공개적인 반대는 자제했지만, 사석에서는 “민주당에 유리할 게 없다” “정의당만 좋은 일 시켜주는 걸 우리가 왜 도와줘야 하냐” 등의 속내를 종종 드러냈다. 선거법 개정을 ‘개혁’이 아닌 ‘밥그릇’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밥그릇’ 관점은 위성정당을 뒷받침하는 논리다. 무조건 밥그릇을 챙겨야 하니까.
애초 선거제 개혁이 낮은 수준의 합의로 이뤄진 데 문제의 출발점이 있다는 의견도 많다. 대의기구인 입법부를 구성하는 선거제도 개편은 헌법 개정에 버금갈 정도로 높은 수준의 합의가 필요함에도 결과적으로 통합당이 배제됐고 동시에 통합당을 지지하는 30% 내외의 국민이 합의에 동참하지 않아, 통합당이 개정 선거법 취지에 불복할 빌미가 됐다는 것이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개정된 선거법의 구속력이 낮은 것은 이 법이 4+1협의체(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만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때부터 비롯된 문제”라고 짚었다. 꼼수가 난무한 이번 선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곧 구성될 21대 국회에서는 낮은 합의 수준의 선거법을 높은 합의 수준의 선거법으로 다시 개정해야 할 숙제를 떠안게 됐다.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왔다.
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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