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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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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밭길로 몰려도 희망을 노래했지만

MB로 시작했으나 MB로 엉킨, 고 정두언 의원의 정치인생
등록 2019-07-20 13:33 수정 2020-05-03 04:29
정두언 전 의원이 2011년 10월 저서 <한국의 보수 비탈에 서다> 출판기념회에서 노래 부르던 모습. 연합뉴스

정두언 전 의원이 2011년 10월 저서 <한국의 보수 비탈에 서다> 출판기념회에서 노래 부르던 모습. 연합뉴스

2001년 당시 이명박 전 의원이 한 정치인의 병실을 찾았다. 가만히 다가가 병상에 걸터앉았다.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앉아 얘기를 나눈 지 1시간 뒤 이 전 의원은 총선에서 낙선해 백수나 다름없던 정치 신인의 마음을 얻게 된다.

이날 이후 서울시장, 제17대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이명박과 선거를 함께한 현역 의원은 그(2004년 총선에서 당선)가 유일했다. 이명박의 선거 때마다 전략, 인사, 살림살이 등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탄생과 동시에 정 전 의원이 ‘개국공신’으로 불리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권세를 누릴 법했다.

MB 정부 ‘개국공신’에서 ‘사찰 대상’으로

정두언.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의심 많은 ‘주군’은 주목받는 2인자에게 합당한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정 전 의원이 ‘도곡동 땅’과 관련된 이른바 ‘MB 파일’을 당시 한상률 국세청장에게 요구한 것이 계기였다고 하지만, 그 또한 확실치는 않다. 분명한 것은 정 전 의원이 어느 대목에서 스스로 말하듯 “역린을 건드렸”고, 그 뒤로 권력의 최측근에서 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급전직하했다는 것이다. 정 전 의원을 향한 청와대 사찰이 시작된 것도 정권 초기다.

이에 대해서는 정 전 의원도 “이명박 정권 초기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실은 나뿐만 아니라, 심지어 국정원장도 사찰했다”고 자신의 책()에서 소상히 밝혔다. 당시 기획조정비서관은 ‘형님권력’의 그림자 박영준이었다. 사찰은 노골적이었고, 이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였다. 이때 정 전 의원이 느낀 상실감은 작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이명박 정권의 사찰은 역대 어느 정권보더 더 사적이었고 비열했다”고 밝혔다.

정치적 생명이 위태로울 만한 상황이 닥쳤지만 정 전 의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상왕’이라던 대통령의 형 이상득 의원의 불출마를 촉구하는 여당 내 55명의 서명을 이끌었다. 그가 ‘풍운아’로 불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출범 100일이 지날 즈음, 그가 의원총회에서 “일부 인사가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다”고 한 발언은 그 뒤로도 꽤 오래 돌았다. 그가 분명하게 색깔을 드러내자 보수의 개혁을 바라는 여당 내 의원들이 주변에 모이기 시작했다. 남경필, 정태근 의원 등 한나라당 소장파는 신선했던 보수 개혁의 동력이었다. 정 전 의원은 정권을 향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이 국면 전환을 위해 시도하던 개헌 추진을 반대해 좌초시킨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추가 감세 철회, 외국어고 개혁, 원자력안전위원회 신설 등 이명박 정부의 기조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세금과 교육 등 기득권을 향한 그의 개혁적 행보에 당시 야당 의원들조차 놀랐 다 한다.

자신이 창출한 이명박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던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뒤늦게 알려졌지만, 그의 깊은 속에는 서운함과 함께 허무와 좌절이 눅진했던 듯하다.

“정권을 같이 만들었으면서 그 한 자리도 주지 않고 내팽개쳐둔 것은 심했고 옹졸했다. 내 입장에서 보면 무언가 역할을 해야 하는데 때로는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촌철살인 논객으로 돌아오다

그는 이명박 정권에서 끝내 부름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박근혜 정권 시절인 2013년 초 저축은행 사건으로 구속된다. 1년 반 뒤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기까지의 시간을 두고 그는 “끊임없는 죽음의 유혹에서도 어떻게든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시련은 이어졌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간발의 차이로 낙선한 것이다. 17대 총선부터 내리 3선을 한 곳이었다. 그리고 2017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국면 한복판에서 그는 새누리당을 탈당했다. 그 뒤로 정치판을 떠난 듯했다.

그는 이후 어떤 삶을 꿈꿨을까. 정 전 의원의 책에 “방송 피디가 내 적성에 훨씬 더 맞았을 것이라며 후회했다”는 말이 남아 있다. 일부 알려진 대로 그는 끼가 넘쳤다. 지금은 청와대 춘추관 자리가 된 서울 종로구에서 태어났지만 철거민이 되어 신촌으로 이사를 가야 했던 궁핍한 어린 시절을 겪으면서도 문학, 연극 등에 열심이었다. 고등학교부터 대학 시절까지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단순히 취미에 그친 것만은 아니다. 그는 4집 음반을 낸 ‘무명’ 가수였다. 국회의원으로 축사해야 하는 자리에 가면 일장연설 대신 자신의 음반 수록곡 을 불렀다. 저축은행 사건으로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6개월 동안 그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 것은 연기와 노래 공부였다.

하지만 그가 돌아온 곳은 시사평론의 세계였다. 큰 틀에서는 정치판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2018년 이명박 전 대통령 수사가 한창일 때, 한 방송에 출연해 “2007년 이명박 전 대통령 대선 당시 경천동지할 세 가지가 있다”는 한마디로 모든 언론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굴곡진 정치 인생을 자산 삼아 할 말은 차고 넘쳤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넘나들며 시사 프로그램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일상이 됐다.

그러던 그가 7월16일 세상을 등졌다. 향년 62살. 평소 우울증을 앓았다고 알려졌지만 주변 인사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만큼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정태근 전 의원과 함께한 SBS 라디오 프로그램 에서도 특유의 입담은 여전했다. 당시 제작진 누구도 그에게서 어떤 그늘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프로그램을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한 뒤 북한산 자락 인근을 지나다가 자신의 차에서 내려 공원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MB “만나려 했는데 안타깝다”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특1호실, 정 전 의원의 빈소가 차려지고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이명박’ 세 글자가 새겨진 근조화환이 놓였다. 정 전 의원은 이명박 정부 내내 그리고 그 이후 끝까지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을 실패로 규정했고, “나 역시 정권 실패에 대해 깊이 참회해야 할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정 전 의원에게 이명박 전 대통령이 메시지를 전할지, 전한다면 무슨 내용일지에 이목이 집중됐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본인(이명박)이 그렇게 영어의 몸이 되지 않았다면 한번 만나려고 했는데 참으로 안타깝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이재오 전 의원을 통해 전한 말이다. 정 전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목소리를 들었을까. 그는 뭐라고 답하고 싶었을까. 아니 시간을 거꾸로 돌려 실제로 그가 정 전 의원을 만났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참고 문헌
(나비의활주로), (21세기북스) 모두 정두언 지음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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