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한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지지자들의 호감을 사는 이유는 그의 ‘깨끗한’ 이미지 덕분이다. 미남형 얼굴에 점잖은 목소리까지 외모가 줄 수 있는 장점을 그만큼 잘 갖춘 정치인은 드물다. 여기에 ‘스펙’도 한몫한다. 법무부 장관에서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선거를 통하지 않고 누릴 수 있는 ‘높은 자리’는 다 거쳤다. 외모는 타고난 것이겠지만, 스펙은 오로지 박근혜 전 대통령 덕분이다.
황 전 총리도 이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박 전 대통령을 위해 견마지로(윗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자신의 노력을 낮춰 이르는 말)를 다했다. 그는 법무부 장관 때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를 지휘하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을 찍어냈다. 채 전 총장이 박 전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권한대행 때는 탄핵당한 박 전 대통령을 위해 박영수 특별검사의 수사 기간 연장 요청을 거부했다. 민심은 무능과 독선에 찌든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는데도 그는 그런 ‘주군’을 끝까지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박근혜 캠프 법률자문 안 했다” 인연 부인</font></font>
그랬던 그가 최근 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애써 부인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이 그의 정치적 자산 축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일까. 가 최근 입수한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수사기록에는 그가 2012년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 후보 쪽을 도운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 나온다.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의 휴대전화에 2012년 8월19일 녹음된 녹취록이다. 박 전 대통령의 대선 후보 수락 연설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최순실씨는 갑자기 황 전 총리를 언급한다. 박 대통령과 최씨, 정 전 비서관이 연설문에 ‘권력형 비리 사건 재판은 모두 국민배심원단에 의해 판단을 받도록 한다’는 공약을 논의하던 중 최씨가 “근데 왜 황교안씨는 그런 것 안 받아?”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박 전 대통령은 “법이 없어요”, 정 전 비서관은 “그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거부하면 국민배심원단으로 안 하거든요”라고 답한다.
이 녹취록에서 최씨는 안대희 전 대법관과 이상일 전 새누리당 의원도 언급한다. 대선 캠프에서 이들에게 맡길 임무를 박 전 대통령과 상의한 것이다. 안 전 대법관은 정치쇄신위원회 위원장, 이 전 의원은 대변인을 맡은 캠프의 핵심 인사들이었다. 따라서 황 전 총리도 당시 박 후보 캠프의 일을 도운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최씨가 캠프와 전혀 무관한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황 전 총리는 당시 법무법인 태평양 소속 변호사라서 정치 활동에 큰 제약이 없었다.
하지만 황 전 총리는 이 녹취록의 내용을 ‘가짜뉴스’라고 단호하게 부인했다. 그는 1월29일 의 녹취록 내용 확인 요청에 “그런 법률자문을 한 바 없다. 어떻게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알 수 없다. 최씨는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답했다. 최씨를 몰랐다는 것은 박 전 대통령 탄핵 무렵부터 그가 줄곧 해온 말이긴 하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을 후보 시절에 도운 사실이 없다는 해명은 선뜻 믿기지 않는다. 박 전 대통령을 전혀 돕지 않았던 인사가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 박근혜 정부의 첫 법무부 장관에 이어 ‘50대 국무총리’까지 했다는 것은 ‘정치적 문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황 전 총리가 대단히 유능한 공직자였다면 그의 해명에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다. 대통령과 개인적 인연이 없더라도 능력이 뛰어나다면 요직에 발탁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공직 생활은 능력만으로 ‘만인지상’에 오를 정도로 특별하지 않았다. 장관이 되기 전까지 그는 28년 동안 검사 생활을 했는데 본업인 수사에서 대단히 무능했다.
2002년 서울지검 공안2부장 시절 그는 야당이던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정형근 의원 등이 폭로한 국정원 도청 문건 수사를 맡았다. 그가 이끄는 수사팀은 국정원을 찾아가 현장조사를 벌인 뒤 “지금의 기술 수준으로는 휴대전화 불법 감청이 불가능하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그러나 이 결론은 불과 3년 만에 뒤집혔다. 2005년 ‘삼성 엑스파일’(국정원 도청 녹취록)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국정원 압수수색 등으로 국정원이 오랫동안 휴대전화 불법 감청을 한 사실을 밝혀내고 임동원·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을 구속 기소했다. 그런데 당시 수사를 지휘한 간부가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던 황 전 총리였다. 앞서 부장검사 때 자신이 실무를 지휘했던 수사가 엉터리였음을 직접 확인한 셈이다. 당시 주호영 한나라당 의원은 이를 문제 삼아 국회 국정감사에서 엑스파일 사건 수사 책임자인 황 전 총리를 교체할 것을 주장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국정원 불법 도청 무혐의’ 엉터리 수사</font></font>
그럼에도 황 전 총리는 지난 1월23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2000년대만 해도 핸드폰 두세 대씩 들고 다녔다. 국정원이 도청했기 때문이다. 내가 (2005년) 국정원 도청 수사를 해서 그걸 막아냈다. 국정원장들도 구속해서 이젠 국정원이 제도적으로 할 수 없게 했다. 내가 공안검사로서 국민들의 휴대폰들을 도청하는 일을 막아낸 거다”라고 말했다. 앞서 2002년 수사를 제대로 했다면 국정원의 적폐를 그만큼 빨리 없앴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쏙 빼놓고 자랑만 늘어놓은 것이다.
삼성 엑스파일 사건의 또 다른 쟁점은 삼성이 검찰 고위 간부들에게 ‘떡값’을 돌렸는지였다. 국정원 도청 녹취록에는 홍석현 전 주미대사가 돈의 전달자로 나오고, 돈을 받은 검사 이름까지 자세히 나온다. 이상호 전 MBC 기자와 고 노회찬 의원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진 이 의혹은 결국 무혐의로 처리됐다. 당시 검찰은 미국에 체류 중이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선 서면조사로 수사를 마무리한 반면, 노 전 의원 등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해 ‘재벌 봐주기’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처럼 ‘엉터리 수사’를 한 그가 2005년 검사장 승진에서 서울중앙지검 1, 2, 3차장 중에 유일한 탈락자가 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서울중앙지검 차장은 검사장 승진 1순위였지만, 당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삼성 봐주기’를 했다는 이유로 황 전 총리를 배제했다. ‘공익의 대표자’인 검사를 지휘할 검사장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황 전 총리는 이 일을 ‘셀프 마케팅’에 활용하는 수완을 보였다.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검사장으로 승진한 그는 자신을 ‘좌파 정권의 희생자’로 마케팅하느라 애썼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보수대통합론자의 낡은 색깔론 </font></font>
대표적인 게 2011년 5월 부산 지역 한 교회에서 한 특강이다. 당시 부산고검장이던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좌파 정부로 규정하고 자신을 포함한 공안검사들이 부당하게 탄압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대중씨는 계속 재야 활동을 했기 때문에 경찰에서도 조사를 받고 검찰에서도 조사받고 정부하고는 계속 갈등했던 분이다. 그런데 이런 분이 대통령 딱 되고 나니까 그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에 있던 검사들이 전부 좌천됐다”고 주장했다. 또 노무현 정부에서도 공안검사에 대한 인사 탄압이 있었다며 이를 ‘환란’에 빗대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과장과 억측에 불과하다. 고영주(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박만(제2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 등 당시 공안을 대표했던 검사들은 김대중 정부에서 각각 대검 공안기획관과 서울중앙지검 1차장 등 요직을 지냈다. 무엇보다 황 전 총리 자신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잘나갔다. 2000년 공안 분야의 엘리트 코스인 대검 공안 3과장과 1과장을 지냈고, 2002년 서울지검 공안 2부장을 거쳐 2005년 서울중앙지검 2차장에 발탁됐다. 그러다 검사장 승진을 앞두고 ‘삼성 봐주기’ 수사로 물먹은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안대희 전 대법관도 김대중 정부 때 검사장 승진에서 몇 차례 탈락했지만 이를 ‘인사 탄압’으로 마케팅한 적은 없다.
황 전 총리의 공안검사 기질은 고교 때부터 나타났다고 한다. 그의 경기고 동문인 노회찬 전 의원은 2015년 인터뷰에서 “나는 유신 반대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고, 그는 학도호국단장이었다. (황 전 총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가치관이 변한 게 없다. 나랑은 많이 달랐다”고 회상했다. ‘황 총리 후보자가 초임 검사 시절 노회찬 의원 등 동창들이 공안 사건에 휘말렸을 때 많은 도움을 줬다’는 당시 언론 보도에 대해 노 전 의원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오히려 황 전 총리는 삼성 엑스파일 수사 당시 공개적인 자리에서 노 전 의원을 원망하는 말을 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언론 브리핑 때 ‘경기고 동문들이 (녹취록 내용을 폭로한) 노회찬 욕을 많이 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이다. 그의 경기고 선배인 안강민 전 대검중수부장(전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 등이 노 전 의원이 폭로한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황 전 총리는 1월29일 자유한국당 당대표 선거 출마 선언을 하면서 “80년대 주체사상에 빠졌던 사람들이 청와대와 정부, 국회를 장악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보수 대통합을 이루겠다는 정치인이 시대착오적인 색깔론을 꺼낸 것은 안타깝지만, 그의 행적을 보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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