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라도 해야 국회의원들이 오다가다 보죠.”
김현기(16)씨는 교복 치마 안에 체육복 바지를 껴입고 무릎 담요를 덮은 채 말했다. 지난 2월15일 서울 여의도 국회 담장 밖 ‘청년 청소년 만 18세 선거권 즉시 통과 촉구’ 농성장을 그는 3일째 지키고 있었다. 그 옆의 이혜연(18)씨는 ‘청소년도 시민이다’ 손팻말을 들고 “추워요”라고 말했다.
김씨가 내민 명함에는 ‘틴즈 디모-십대들의 민주주의’라고 적혀 있다. 틴즈 디모는 2016년 광장에서 태어났다. “오늘은 여기로 온 거예요.” 그는 ‘더불어민주당 청년위 18세 참정권 특위’라고 적힌 현수막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그들 옆에는 당원이 되지 못하는 당원이 서 있다.
중학생 여진수(14)씨 “정의당 대표님의 말빨이 좋아서” 당원이 되고 싶었지만, 정당법상 19살 이하가 당비를 내면 불법이다. 그런 청소년을 위해 정의당은 ‘예비당원’ 제도를 두고 있다. 여씨는 “제가 정치인이라도 청소년이 꽥 하는 소리는 그냥 무시할 것 같다”며 “선거연령을 낮춰 정치인들이 (청소년을) 조금이라도 두려워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직선거법을 개정해 선거연령을 18살로 낮추는 것을 야당이 자꾸만 미루자 2월13일 농성이 시작됐다. 정의당 청년미래부가 더불어민주당 청년위원회에 제안하고, 청소년단체가 농성에 가세했다. 농성장 뒤로 바로 보이는 의사당, 여전히 이들은 여의도 국회가 밀어낸 담장 밖 존재다.
담장 안 국회는 열심히 주판알을 굴리는 중이다. ‘18세 선거권 부여’에 야당이 합의했지만, 자유한국당은 ‘교실의 정치화’ 논리로 반대한다. 만 18살인 고등학교 3학년이 선거권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2월13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원내대표들이 오찬 회동을 갖고 선거연령을 18살로 낮추되 적용시기를 2020년 총선으로 늦추자고 합의했다. “자유한국당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한국 정치가 넘어야 할 숫자 ‘19192540’그러나 자유한국당은 이 절충안마저도 거부하고 있다. 초중고 재학 시기를 1년 줄이는 학제 개편을 먼저 해야 논의가 가능하단 것이다. 원래 학제 개편에 반대했던 야당 3당은 이 논리에 휩쓸리며 좌고우면하고 있다.
2월15일 현재, 공직선거법 개정안은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이하 안행위) 법안 심사 소위를 거쳤지만 전체회의에 상정되지 못하고 있다. 2월 임시국회 회기가 얼마 남지 않았고, 야당의 의지가 확고하지 않아 개정안 통과가 불투명하다.
농성장에 함께한 나경채(44) 정의당 공동대표는 “민주당이 역풍을 맞을까 지나치게 우려한다”며 “광장정치에 신뢰가 부족해서”라고 지적했다. 2월 넷째주에 안행위 전체회의가 열리는데, 소속 의원들은 당 지도부의 결정에 따를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마흔이 넘도록 상황이 똑같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나경채 대표가 말했다. 전교조 세대인 그는 1980년대 후반 고등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고등학생운동에서 청소년운동으로 이어진 20여 년, 청소년 참정권은 미완의 의제였다. 그가 농성장을 지키는 이유도 이런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나 대표는 “일본의 평화헌법 9조를 지키는 ‘9조회’처럼 ‘19192540회’를 만들자고 해왔다”고 말했다. “19세 미만은 투표를 못하고 정당 가입도 안 되고, 25세 미만은 국회의원 출마를 못하고, 40세 미만은 대통령 피선거권이 없다. ‘19192540’은 한국 정치가 젊어지고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8자리 숫자다.” 그는 “18살 선거권은 한국 정치 개혁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보호’ 명목하에 청소년을 정치로부터 격리”국회가 포위된 것처럼 보일 만큼 ‘18세 선거권 요구’는 거세다. 이번에 전국 고등학교 학생회장 네트워크를 포함한 ‘18세 선거권 확대를 위한 청소년·청년 연석회의’가 순식간에 결성됐다. 연석회의는 지난 1월 16~31일 국회의원 300명 전원을 대상으로 ‘선거연령 만 18세 하향 방안 찬반 의견 조사’를 벌였다. 의원 300명 중 176명(58.6%)이 찬성했다. 보류 118명, 무응답 4명, 조건부 동의와 의견 없음은 각각 1명이었다.
18살 선거권 요구는 청소년만의 것이 아니다. 1월19일 전국의 시도교육감 17명 중 11명이 참석해 ‘선거권 18살 인하 촉구’ 성명서를 채택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18세는 ‘교복 입은 유권자’”라고 강조했다. 광주 광산구, 광주 동구 등 지방자치의회도 공직선거법 개정을 촉구하는 건의안을 채택했다. 한국청소년수련시설협회,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 한국청소년재단 등 청소년과 함께해온 이들이 ‘18세 선거권 국민연대’를 결성했다. 이 연대는 다음 총선까지 18세 선거권을 유예하는 논의가 나오자 “정치적 거래와 흥정의 대상이 아니”라며 “대출상환 3년 유예하듯 다뤄질 수 없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교실이 정치판’이 된다는 주장에 대한 실증적 반박도 이어졌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 아동위원회는 2월15일 발표한 성명에서 “행정자치부의 2016년 주민등록 인구 통계 수치만으로도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고등학교 3학년 재학생 중 약 9.7%만이 만 18세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성명은 “실제 만 18세 청소년의 다수는 고등학교 현장을 벗어나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 존재하는데 ‘학교 교육’을 이유로 투표권 행사를 막는 것은 그 자체로 명백하게 부당한 차별”이라며 “‘보호’라는 명목하에 대다수의 청소년을 정치로부터 격리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현행 선거연령이 대학생의 참정권을 제한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는 2월9일 국회 연설에서 “지난해 4월13일 총선에서 대학교 1학년 학생 중 80%가 만 19세 이상만 투표권을 주는 현행 법률 때문에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녹색당은 “19대 대선에서 18세 시민 68만명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론조사 결과도 우호적이다. 이 여론조사 기관 엠브레인에 의뢰해 전국 만 19~69세 기혼여성 1026명을 상대로 2월 6~7일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55.7%가 18세 선거권에 찬성했다.
“투표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데…”지난 1월19일 유튜브 채널 ‘프란’에 올라온 ‘만 18세 선거권 반대 의견에 댓글을 달아봤다’ 영상에는 농성장에서 만난 김현기씨가 등장한다. ‘부모나 선생님의 의견에 휩쓸리기 쉽다?’는 논리에 그는 “휩쓸렸으면 저는 현재 친박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지윤씨는 “어른들은 많이 알아서 박근혜 뽑았나?”라고 묻는다.
나경채 정의당 공동대표는 “광장에 나와서 함께 민주주의를 지켰던 청소년 대부분이 법을 바꾸지 않아도 다음 총선에서 선거권을 얻는다”며 “‘우리가 왜 투표할 수 없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정치가 보답하는 유일한 길은 선거권”이라고 말했다. 유튜브 영상에서 청소년 이용기씨는 “투표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데 만 18세 청소년들도 그 꽃향기를 맡을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지금 그것을 나누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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