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 눈에 가장 진보적으로 비치는 대선 후보는 누굴까. 반대로 가장 보수적으로 보이는 후보는? ·서울대 폴랩 연구팀이 2016년 12월29~30일 1054명에게 실시한 여론조사에 실마리가 있다. 가장 진보적인 후보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성남시장, 가장 보수적인 후보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었다.
가장 진보적인 후보에게 0점, 가장 보수적인 후보에게 10점을 주도록 한 설문조사에서 문 전 대표는 평균 3.5점, 반 전 총장은 평균 6.3점을 얻었다. 그 사이에 나머지 후보 7명의 이름이 있었다. 여론조사 1·2위를 달리는 여야 후보가 이념적으로 양쪽 끝에 있다고 유권자는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대권 주자들의 때이른 중도 구애그래서일까. 새해 들어 ‘극단의 후보’들이 “나는 가운데 있다”고 눈에 띄게 강조하기 시작했다. 지난 1월15일 문재인 전 대표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한반도 배치에 대해 “한·미 합의가 이미 이뤄진 것을 취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기존 ‘사드 재검토’ 입장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갔다.
민주당 당론인 ‘법인세 인상’과 관련해서도, 문 전 대표는 ‘선 조세 감면 축소-후 법인세율 인상’을 강조했다. 역시 우클릭으로 읽히는 발언이다. 대신 문 전 대표는 ‘일자리 정부’ 구상 설파에 공들이고 있다. 2015년 당대표 시절 앞세웠던 ‘유능한 경제 정당’ ‘안보 중시 정당’이라는 중도화 노선을 대선 전략으로 다시 띄우려는 모습이다.
반기문 전 총장은 좀더 노골적이다. ‘진보적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반 전 총장은 1월12일 귀국 뒤 기계적으로 ‘보수 반-진보 반’ 일정을 이어가고 있다. 영남과 호남, 천안함기념관과 전남 진도 팽목항을 두루 방문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씨와 이명박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메시지도 수시로 좌우를 오갔다. ‘박근혜 대통령의 올바른 용단’이라던 12·28 한·일 정부 ‘위안부’ 합의에 대해선 “완벽한 합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수준이 돼야 한다”고 슬쩍 재협상에 무게를 실었다. 또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인 촛불집회에 “기회를 봐서 참석하겠다”고 하더니, 이틀 뒤에는 박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탄핵심판에) 부디 잘 대처하시길 바란다”고 위로했다.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려는 ‘광폭 중도 행보’다.
이들이 이토록 다가가려 애쓰는 ‘가운데’에는 누가 있을까. 유권자는 비교적 분명하게 자신의 이념 성향을 보수나 진보, 또는 중도라고 판단한다. 한국갤럽의 1월10~12일 조사에선 응답자 1007명 중 35.3%가 자신을 진보로, 28.3%가 보수로, 27.4%가 중도로 규정했다. 약 한 달 전 조사보다 중도는 줄고 진보와 보수는 늘었다.
‘중도’에 대해 학술적으로 정리된 개념은 없다. 선거 전략가, 여론조사 전문가, 학자마다 설명이 다르다. “특정한 정책이나 노선에 대해 일관성이 결여된 유동층(스윙보터)”(김헌태 매시스컨설팅 대표), “보수와 진보가 말하는 한쪽 방향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 세력들”(이상일 아젠다센터 대표)이라는 설명은, 보수·진보 정당이나 노선에 일체감이 낮거나 유동적인 사람들로 중도를 규정한다.
반대로 “민주, 반부패, 공동체, 안보 등 보편적 가치를 상당히 중시하나 이를 대변하는 정당을 찾지 못해 떠도는 사람들”(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이라는 설명처럼, 중도가 특정 가치를 공유한다고 보는 전문가도 있다.
“중도보수와 중도진보는 기본적으로 각각 보수와 진보지만 상대방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사람들”(최태욱 한림대 국제대학원 교수)이라는 규정은, 중도를 ‘열린 태도’로 설명한다. “무당파, 즉 정치 무관심층, 기존 정치권에 실망해 새로운 정치세력을 기대하는 층, 보수·진보의 중간을 선호하는 층 등이 혼재돼 있다”(이택수 리얼미터 대표)는 폭넓은 정의도 있다.
“중도를 위한 이데올로기는 없다”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적어도 중도는 특정 이념을 공유한 집단이 아니며, 그 이념이 보수와 진보의 중간치는 더더욱 아니다. ‘프레임 이론’의 권위자 조지 레이코프 미국 버클리대학 교수(언어학) 역시 이념의 틀로 중도를 해석하는 시도를 경계했다. “중도를 위한 이데올로기는 없다. 중도파의 신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중도는 어떤 문제에는 보수적이고 어떤 문제에서는 진보적이다. 다양한 조합이 존재할 뿐이다.”
중도는 ‘사드 배치 찬성’과 ‘법인세 인상 반대’라는 보수의 주장에 각각 50% 정도씩 동의하는 게 아니라, 사드 배치에는 찬성하지만 법인세는 인상해야 한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념의 틀을 제거하고 나면 유동층, 무당파, 정당 일체감이 낮은 보수·진보 정당 지지자 등 다양한 유권자를 중도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중도의 실체는 모호하지만 선거판에선 분명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2011년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 2012년 안철수 신드롬, 2016년 4·13 총선에서 국민의당의 성공 등은 중도가 써내려간 드라마라는 분석이 많다. 특히 투표율이 높아 보수·진보 진영 간에 ‘51 대 49’ 한판승이 벌어지는 대선에선 중도의 표 값이 높아진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 교수는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승리한 요인 중 하나로 중도의 표심을 설명한다. “대선 직후 12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중도라고 밝힌 유권자의 43.9%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이보다 1.2배 많은 54.8%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11월24일) 안철수 후보 사퇴 이튿날 한 여론조사에서 안 후보를 지지하던 중도·무당파의 문 후보 지지율은 박 후보보다 2배가량 높았으나 (이후 선거 과정에서) 박 후보의 중도층 흡수가 더 많이 진행됐다고 추론할 수 있다.” 선거 막판까지 마음을 정하지 않은 3~5%의 유동층을 잡는 게 승부를 좌우한다고 전략가들은 말한다. 극단 후보들의 중도화는 자연스런 선거 득표 전략인 셈이다.
이들이 중도에게 구애하는 시기는 다소 특이하다. ‘선 결집-후 확장’은 선거 교본의 첫머리에 나온다. 내 편(집토끼)의 지지와 신뢰를 최대한 확보하고 나서 내 편이 아닌 사람(산토끼)을 새로 공략하는 작전이다.
반기문, 귀국 컨벤션 효과 전혀 없어결집 전략은 보통 정당에서 후보를 선출하는 ‘경선’ 과정에서, 중도 확장 전략(Go to the center)은 상대 후보와 겨루는 ‘본선’ 과정에서 각각 집중적으로 활용된다. 보수 또는 진보라는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 당의 선택을 받은 뒤 노선을 수정해 중도로 외연을 확장하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아직은 여야의 예선 윤곽도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민주당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 시기와 상관없이, 2월에 경선을 치르고 3월에 후보를 확정하겠다는 일정을 일찌감치 세워두긴 했다. 하지만 범야권 공동경선인 일명 ‘촛불공동경선’과 결선투표제 도입 등 경선 규칙은 정하지 못했다. 반 전 총장은 기존 정당에 들어갈지, 제3지대에서 신당을 만들지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후보들이 본선 전략을 펴기엔 때가 이르다.
그런데도 문 전 대표와 반 전 총장이 일찌감치 중도 공략에 나선 건 예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본선 직행이다. 이유는 서로 다르다. 보수는 반 전 총장에게 더 이상 비빌 언덕이 아니다. 아무리 보수를 결집해도 진보를 이기기 쉽지 않은 선거다. 새누리당(10.7%)과 탈당파가 만든 바른정당(6.8%)의 지지율을 합쳐도 반 전 총장 개인의 지지율(20%)에도 못 미친다( 1월15~16일 여론조사). 비상 상황이므로 결집 과정 없이 곧바로 중도 확장 전략을 쓰는 고육지책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반 전 총장이 단기 지지율 상승을 꾀하려면 보수층을 결집하는 게 빠르다. 그러나 그런 1차 전략을 썼다가는 이후 탄핵 정국에서 중도층으로 표를 확장해나가며 본선 승리를 낙관하기 어렵다.” 이상일 대표의 분석이다. 여권 후보인 유승민 의원과 남경필 경기지사가 ‘보수의 적통’을 놓고 반 전 총장과 각을 세우는 대신, 연일 재벌개혁·육아휴직 3년·모병제·사교육 폐지 같은 좌클릭 정책을 내놓는 이유도 연장선에 있다.
위험한 전략이긴 하다. 중도 확장 전략의 핵심은, 지지층의 결집력을 허물어뜨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선명성을 양보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지지층의 신뢰가 단단해야 한다. 그러나 반 전 총장은 보수의 심장인 대구·경북(TK)에서도 문 전 대표에게 뒤진다. 그가 주춤한 사이 강경 보수인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5% 안팎까지 지지율이 올랐다. 박성민 ‘컨설팅 민’ 대표의 분석은 이렇다.
“김영삼의 3당 합당, 김대중의 DJP 연합,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 박근혜의 경제민주화 경우에는 그들의 지지자들이 (자기 후보가) 이 상황을 통제할 리더십이 있다고 봤다. 그러나 보수 쪽에서도 확실한 신뢰를 확보하지 못한 반 전 총장이 중도 행보를 하는 건 아주 위험하다.”
반면 문 전 대표는 어느 때보다 진보 진영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뒤 한 달 사이에 호남 지지율이 두 배 가까이 뛰었다. ‘문재인 대세론’에 이재명 성남시장과 박원순 서울시장,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 등이 선명한 정체성을 앞세워 공세에 나서고 있지만 지지율 격차는 좁히지 못하고 있다. 문 전 대표가 본선으로 직행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다.
탄핵 정국에서 정권 교체 가능성이 높은 1위 후보로 야권 지지층 쏠림 현상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 결집이 충분하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여론은 70~85%로 압도적이지만 문 전 대표의 지지율은 반 전 총장과의 양자 대결에서 45~50%, 다자 대결에서 25~30% 정도다. 이후 지지층이 추가로 모이지 않거나 이탈하면, 예선에선 촛불집회 때의 ‘이재명 현상’이, 대선에선 4년 전의 악몽이 재현될 수도 있다.
최태욱 교수는 “언제부턴가 문 전 대표가 중도진보가 아니라 그냥 보수가 되는 건 아닌지 아찔할 때가 있다”며 “선거에 이기려고 그런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지도자에게는 안정적으로 자기 정체성은 지키되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때이른 중도 확장 전략의 함정이다.
어떻게 위험을 낮출까. 지지층을 지키면서 중도의 호응을 이끌어낼 방법은 기술이 아니라 메시지다. 기계적 우클릭·좌클릭으로 중도에 다가가는 대신, 매력적인 진보와 보수 후보가 돼서 중도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이념, 정치 성향, 정치 행태가 복잡다단한 중도를 내 편으로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다.
이는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이 되느냐, 이기는 버니 샌더스가 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힐러리는 우경화로 중도를 공략하려다 경선에서 가까스로 민주당 후보가 됐지만 결국 도널드 트럼프에게 졌다. 진보적 정책과 선거 캠페인으로 국민을 감동시킨 샌더스가 본선에 나갔다면 결과는 달랐을 수 있었다는 관측도 나온다.
지난 대선에서 문 전 대표가 패배한 원인도 ‘너무 진보해서’가 아니라 ‘너무 메시지가 없어서’라는 분석이 많았다. 선거 20여 일 전까지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에만 기댄 나머지, 경제민주화와 복지 어젠다는 박근혜 후보에게 빼앗기고 국민이 바라는 새로운 어젠다는 만들어내지 못한 게 패배의 핵심이었다.
네 편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국가, 정치, 공적 영역에 엄청나게 분노한 촛불 민심은 이번 대선만 바라보고 있다. 그런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고 표 계산만 한다면, 선거 승패는 둘째치고 선거 뒤에도 민심의 공황 상태가 지속될 거란 우려가 나온다.
박성민 대표는 “정권 교체 여론이 압도적이어서 안보, 사드 이런 개별 이슈에 반응하지 않는다”며 “특별한 일이 벌어졌을 때는 (후보들도) 특별하게 대응을 해야지, 일상의 선거처럼 한가한 캠페인을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센터장도 “과연 진보나 보수 후보가 대중이 호응할 수 있는 정권 교체 메시지를 만들어낼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있지도 않은 보수와 진보의 중간을 좇아다니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다.
, 유창오 지음, 폴리테이아 펴냄, 2016
, 채진원 펴냄, 인물과사상사 펴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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